[한경 잡앤조이=조수빈 기자]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잠산 작가의 작업실 벽면에는 캐릭터 구성을 위한 스케치들이 놓여있다. 세밀하고 따뜻한 느낌의 드라마 ‘남자친구(tvN)’ 속 삽화로 대중과 만났던 잠산 작가는 최근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tvN)’에서 흡입력 있는 잔혹동화로 대중들의 큰 관심을 얻었다. 과거 게임, 책, 광고 등의 업계에 주로 진출하던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새로운 업계 진출의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잠산 작가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진출할 수 있는 분야는 시간이 갈수록 더 무궁무진해질 것이다. 나만해도 광고 일러스트부터 앨범 재킷, 건물 파사드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며 “아마 저를 모르시더라도 제 손이 닿은 작품은 한번쯤 보셨을 것”이라며 웃었다. 태블릿 위에서 이야기를 쓰는 일러스트레이터 잠산 작가를 만나봤다.
일러스트레이터 잠산
Profile 경력 홀리카홀리카 건물 파사드 디자인 서태지 ‘소격동’ 앨범 아트 드라마 ‘남자친구’ 일러스트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일러스트 및 동화책 제작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20여년차 프로 일러스트레이터 잠산(본명 : 강산)이라고 한다. 예고에서는 동양화를 전공했고 대학에서는 만화예술학을 전공했다. 동양화를 전공하게 된 것도 만화를 좋아해서였다. 동양화도 선을 이용해서 그릴 수 있는 특화된 분야라 만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전공을 하게 됐다. 지금은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박신우PD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컨셉아트를 처음 시작한 1세대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들었다 “보통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시간이 지나며 하나의 장르에 집중하게 된다. 점점 더 전문적으로 기술과 색감 등을 고도화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고도화 작업보다는 다양하고 넓은 재미를 추구하고 싶다는 욕구가 늘 있었다. 그래서 컨셉을 정해놓고 그를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표현하는, 장르로 규정받지 않는 일러스트를 만들고 싶어 시작하게 됐다.” 컨셉아트와 일러스트의 차이는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일러스트 안에 컨셉아트가 속해있다고 보면 된다. 컨셉아트는 장르가 아니라 ‘콘셉트’를 따라 움직인다. 원래 컨셉아트는 주로 게임산업과 관련이 있었다. 프로젝트마다 새로운 게임의 세계관에 맞춰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컨셉아트는 일러스트의 한 종류지만, 조금 더 작가의 개성이 드러날 수 있는 자유로운 그림이라고 보면 된다.” 작업 방식이 궁금하다. 주로 의뢰를 받는 편인가 “주된 작업은 의뢰로 이뤄진다. 홈페이지로 의뢰를 많이 주신다. 제 그림을 관심 있게 보던 분들이 작업을 할 기회가 생기면 연락을 주신다. 그러면 마감 기한을 가장 먼저 체크한다. 그 다음 어떤 스타일을 원하는지, 포트폴리오 중 어떤 그림을 보셨는지 등 질문을 많이 던지는 편이다. 마지막에 금액까지 합의가 되면 작업을 시작한다. 옛날에는 그려서 스캔하고 팩스 보내는 등 작업 과정이 복잡했다. 지금은 카톡이나 통화로 아이디어를 공유한 다음 그리니까 옛날보다는 작업 방식이 많이 간단해졌다. 완성한 개인 작업물이 어느 정도 모이면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잠산 작가의 작업물.
‘사이코지만 괜찮아’로 삽화에 대한 관심도 대단하다. 드라마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새로 도전한 스타일의 그림에 관심을 많이 주셔서 감사하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남자친구’에서 작업을 같이 했던 박신우PD와의 인연이 가져다준 작품이다. 전작보다는 그림에 대한 비중이 상당히 커졌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도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터닝포인트라고 표현한 이유가 궁금하다 “원래는 복잡하고 밀도 있는 감성의 그림을 주로 그렸다. 일러스트 시장 자체가 장르의 개성을 수용할 인구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릴 수 있는 스타일에 제한이 있는 편이다. 옛날 대중들은 밝고 따뜻한, 아름다운 것들을 주로 선호했다. 지금은 잔혹동화, 좀비, 어두움 등의 마이너한 감성들도 점차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색톤의 거칠고 메마른 느낌을 가진, 성인을 위한 잔혹동화의 삽화를 그리는 과정은 제게도 새로운 도전이 됐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드라마, 삽화 등이 이슈가 된 것 자체가 대중에게도, 제게도 터닝포인트가 아닐까.” 일러스트와 드라마가 협업하는 경우가 많은 편인가 “드라마 ‘남자친구’가 처음이었다. 남자친구에서는 인트로나 아웃트로에 드라마의 함축적인 뜻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에 그쳤다면, 이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는 아예 드라마의 핵심 키워드로 자리잡았다. 국내에서는 최초고 해외에서도 드문 케이스다. 실제로 동화책까지 출판하게 돼 업계에 좋은 예제가 될 것 같다.” 작업에 대한 영감은 어디서 얻나 “감정이 가지는 상징성은 사람마다 다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소재를 찾아내려고 한다. 외로운 늑대의 이야기를 가져온다고 생각해보자. 나타난 대상은 외로운 늑대지만 읽는 사람들은 그 대상에 사람을 투영해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 식으로 동일한 공감대에 아예 다른 공간,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다보면 어느새 작업할 것들이 생각난다. 상상력이 뛰어난 편인 것 같다.(웃음)” 프리랜서에게는 ‘협상의 기술’이 중요하지 않나. 자신만의 비법이 있다면 “솔직함이 무기라고 생각한다. 수작업과 디지털으로 변화하는 시대의 첫 세대였다.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장르에 대한 의뢰도 많이 받았던 시기다. 건물 파사드 그래픽, 광고, 동화 삽화 등등 여러 가지 장르가 혼합되며 기존 수작업품과는 다른 디지털 작업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면서 이런 디지털 작업의 가격을 어떻게 책정해야 할지에 대해 작가도, 클라이언트도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 결론은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최대한 상대방과 솔직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만족스러운 가격 협의를 할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이만큼 받고 싶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해주는 것이 좋다.” 20년 동안 같은 직종에 종사하면서 슬럼프도 왔을 것 같다 “최근에 슬럼프가 한 번 왔던 것 같다. 시대가 바뀌며 그림 업계쪽도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끼지만 변화를 따라갈만큼의 의욕이 사라지면서 작업에 재미를 크게 못 느끼는 시기가 왔다. 계속 재미있는 일을 찾으려고 시도했던 것이 슬럼프 극복에 도움이 된 것 같다. 재미있는 일 중 하나가 드라마 작업이었다. 작업을 하면서 작업방식, 그림 스타일도 완전히 바꿔버렸다. 해보고 싶었던 잔혹동화 작업을 위해서 명쾌하고 간단한 펜터치의 작품 스타일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 일에 재미도 다시 붙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 가장 뿌듯할 때는 언제인가 “너무 많아서 대답하기가 힘들 정도다. 이 친구 하나를 꼽자니 다른 친구들이 서운해할 것 같은 느낌. (웃음)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늘 즐겁게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림을 시작한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것은 해야 한다’는 마인드로 여러 작업들을 하고 있다. 그런 작업들이 실제로 반응이 좋으면 더 뿌듯함의 정도가 크긴 하겠지만, 그런 결과물을 매번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 보람차다.” 가장 힘든 점을 꼽는다면 “일러스트레이터뿐만 아니라 그림, 혹은 끊임없이 아이템을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마 공통적인 대답을 할 것 같다. 계속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야 하다 보니 제대로 쉬는 시간이 없다는 점이 가장 힘들다. 수시로 클라이언트와 통화해가며 프로젝트 방향을 맞춰야 하고 밤을 샐 때도 많다. 젊을 때는 그런 활동도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보니 참 힘들게 작업을 하며 살았구나 느낄 때도 있다.”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은 무엇인가 “이해력이다. 작업을 함께 하는 상대에 대한 이해력, 주고 받는 대화, 단어에 대한 이해력이 참 중요하다. 상대방이 왜 이 단어를 써 작업을 의뢰했는지 등을 곱씹다 보면 자연스럽게 작업에 대한 방향성도 잡힌다. 각자가 전문분야에 따른 단어의 이해도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습관이다. 또 다른 점은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개성’이다. 작품의 개성은 작가의 명함과도 같다. 그림만 보고도 ‘아, 이 사람 작품이다’ 정도의 특색이 있다면 본인의 차별화 전략으로도 상당히 유리하다.”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후배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공확률에 대해 질문하는 친구들이 많다. ‘이렇게 하면 성공할까요?’, ‘이렇게 그려도 될까요?’ 등등. 성공 확률은 본인의 노력으로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재능이 있는 친구들이 빨리 성공까지 도달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 친구들이 살아남을지,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낼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성공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는 방법은 자기가 도전하고 싶은 방향에서 ‘현재’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단순히 연장자, 일러스트를 해본 경험자 말고 반드시 그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여러 조언을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subinn@hankyung.com [사진=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