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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러고 있지?’ 문득 든 의문에 늦깎이 입문...영화 ‘델타 보이즈’ 고봉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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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로 라이프] 영화감독 고봉수




 ‘한번 놀러 와’ 엄마친구 말에 무작정 미국행…7년 체류하며 독립 영화 200편 찍어



영화 '델타 보이즈'의 고봉수 감독


[캠퍼스 잡앤조이=강홍민 기자] “저희 그냥 좋아서 하는 건데요?” 돈, 빽, 능력마저 없는 네 명의 아재들이 꿈에 도전하는 영화 ‘델타 보이즈’는 ‘한번 뿐인 인생’을 즐기는 욜로족 이야기다. 밑바닥 인생이지만 하고 싶은 걸 위해 생계마저 던지는 모습에 관객들은 안쓰러움과 동시에 희열을 느낀다.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고봉수 감독 역시 자타가 공인하는 욜로족이다. 만약 그가 욜로가 아니었다면 ‘델타 보이즈’역시 세상 구경 못 했을지도 모른다.    

#제작 기간 15일, 제작비 250만원 #1년 만의 개봉

제작 기간 15일, 제작비 250만원,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 ‘델타 보이즈’는 지난해 <제17회 전주 국제 영화제-한국경쟁부문 대상>, <제21회 인디포럼-올해의 관객상>, <제4회 인천 독립 영화제-관객 인기상> 등 국내 굴지의 독립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었다. 독립 영화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저예산과 단시간 내 제작돼 주목을 받은 이 영화는 각종 수상 이후 다음 단계로 개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되진 않았다.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걸 보곤 너무 기뻤죠. 영화를 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거든요. 그래서 개봉도 바로 할 줄 알았죠. 근데 시간은 계속 지나는데 개봉이 늦춰져 나중에는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죠.”

 

영화 후반 작업을 마친 고 감독은 일주일에 한 번 배우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감독과 배우 모두 크리스천이라 매주 영화 개봉을 위한 기도회를 갖기 위해서였다. 감독과 배우의 간절함이 통했던 것일까. 영화 ‘델타 보이즈’는 촬영 1년 만인 오는 6월 전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 






#스물아홉, 영화감독으로 데뷔 

스물아홉, 늦은 나이에 영화계에 입문한 고 감독은 영화 비전공자다. 그렇다고 영화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생계전선에 뛰어든 그는 이십대를 공사현장과 세탁소를 전전하며 세월을 보냈다. 딱히 관심 있는 분야가 있다거나 꿈이 있지도 않았다. 

“스물여덟까진 그냥 그렇게 살았어요.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뭘 해야 할 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뭘 하면 재미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다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됐죠.” 

고 감독이 발견해 낸 두 가지는 바로 ‘청소’와 ‘이야기를 꾸며내는 일’이었다. 고 감독에게 ‘청소’란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습관이자 버릇과도 같았다. 남의 집에 가서도 어질러진 방을 그대로 두고 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또 하나, 이야기를 만드는 데엔 탁월한 재주가 있었던 그는 학창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이야기꾼이었다. 

“문득 중학교 때 쓴 소설이 생각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당시엔 그걸 반 아이들이 돌려볼 정도로 인기가 있었죠.”

이야기를 만드는 재주를 살리기 위해 고 감독은 그길로 영화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3개월 속성 과정으로 촬영과 편집 기술을 익히고, 직접 쓴 시나리오로 곧바로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카메라는 친구에게 빌리고 배우는 삼촌이, 촬영, 음향, 조명은 고 감독 혼자 맡았다. 그의 첫 작품인 영화 ‘개구녕’의 탄생 배경이다. 독립영화라는 간소함도 있었지만 생각나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하는 그의 성격이 빠른 데뷔에 한 몫 한 셈이다. 그때 고봉수 감독의 나이가 스물아홉이었다. 

#엄마 친구 따라 간 미국행 #7년 간 200편의 영화

영화의 재미를 맛본 그는 그때부터 카메라를 들고 온 동네를 누비며 영화를 찍었다. 첫 작품과 마찬가지로 주변의 도움을 빌려서 말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 그는 인생 2막을 경험하게 된다. 

“엄마 친구 분이 미국에서 목회를 하시는데 잠시 한국에 오신 적이 있었어요. 저를 보시곤 지나가는 말로 봉수야, 언제 시간되면 미국에 놀러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바로 미국으로 놀러갔죠.(웃음) 말씀은 안하셨지만 좀 당황하셨을 거예요.”

말 그대로 미국에 놀러간 그는 엄마 친구 교회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 문득 영화가 만들고 싶어졌다. 혈혈단신이었던 그는 수소문 끝에 교회에 다니던 영화 학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연히도 그 교회에 영화를 전공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한테 학교에서 카메라를 빌릴 수 있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대요. 학교에 연기 전공하는 친구들도 많다는 말을 듣곤 같이 영화를 찍자고 제안했죠.”

고 감독은 자신의 첫 작품인 ‘개구녕’을 미국에서 리메이크해 지역 독립영화제에 출품하고 상도 받았다. 수상 소식이 알

려지자 영화과 교수님을 비롯해 주변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손길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잠시 떠난 미국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지만 그런 현실이 재밌었어요. 촬영 장비나 배우들이 있으니까 닥치는 대로 영화를 찍었죠. 아마 그때 짧은 시간 안에 영화를 만드는 기술을 습득한 것 같아요. 미국에서만 200편의 영화를 만들었거든요.(웃음)”

미국에서의 체류시간이 점점 길어진 그는 어학연수를 신청해 학생비자를 받았다. 그러던 중 애틀란타로 넘어가 CBS 한인 라디오 디제이를 맡기도 했다. 그 사이 영화 촬영은 계속 됐다. 잠시 떠난 미국에서 고 감독은 7년을 체류했다.   

#14년차 독립영화감독으로 산다는 건?

고봉수 감독이 독립영화감독으로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니가 무슨 영화야?’, ‘니가 되겠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말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놓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독립영화감독을 산다는 건 정말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주변의 민폐죠. 딱히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니거든요. 영화를 만들면서도 돈 되는 일은 계속 해야 하죠. 그래도 영화를 계속하는 이유는 살면서 이것만큼 재미있는 게 없었어요. 인생 한번 사는데 재미있는 일 해야죠.”



#욜로 감독님, 꿈이 있나요?

“꿈이라면 주성치 감독처럼 고봉수 사단을 꾸려 평생 영화만 찍는 거예요. 델타 보이즈에 참여했던 백승환, 이웅빈, 신민재, 김충길, 윤지혜 배우 모두 제 사단이거든요.(웃음) 그리고 제 사단에 꼭 넣고 싶은 배우가 있어요. 제 다음 작품에 배우 조달환, 천우희 씨가 꼭 참여해주셨으면 좋겠어요.(웃음)” 

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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