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연합뉴스) 성연재 기자 = 도쿄를 걷다 보면 이 도시가 단순히 더 높이, 더 크게 짓는 데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도시의 기억을 어떻게 남기고, 사람들이 머물고 걷는 경험을 어떻게 새롭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곳곳에 스며 있다.
ADVERTISEMENT

아자부다이 힐스가 초고층 복합개발 속에 녹지와 보행, 문화와 상업을 결합해 새로운 도쿄의 풍경을 보여준다면, 오쿠아사쿠사는 오래된 골목과 건물, 생활문화를 지키고 가꾸며 도쿄 사람들의 시간을 이어간다.
여기에 전통 정원과 현대 건축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네즈미술관까지 더하면, 새로 짓고 오래 남기고 옛것 위에 현대를 포개며 만들어진 오늘의 도쿄가 한층 다르게 보인다. 텅 빈 상가가 늘어가는 우리의 획일화된 현실과 대비되며, 공간의 가치를 묻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 오쿠아사쿠사에서 만난 도쿄의 속살
일본어로 '오쿠'는 깊숙한 곳, 또는 안쪽이라는 뜻을 지닌다. 아사쿠사는 일본을 대표하는 관광지 중 하나로,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번화한 곳이다. 오쿠아사쿠사는 말 그대로 그런 아사쿠사의 안쪽에 자리한 또 다른 얼굴이다.
센소지를 중심으로 관광객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거리에서 조금만 더 안으로 들어서면 분위기는 이내 달라진다. 기념품점과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화려한 간판은 줄어들고, 대신 작은 술집과 이자카야, 오래된 주택, 동네 사람들이 오가는 조용한 골목이 이어진다.
이곳은 관광객을 위해 꾸며놓은 도쿄라기보다 도쿄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공간에 가깝다. 아침 골목을 걷다가 길가에 내놓은 재활용 쓰레기마저 눈길을 끌었다. 전날 밤 술집에서 나온 듯한 빈 술병들이 플라스틱 상자에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아무렇게나 쌓아둔 것이 아니었다. 병 하나하나가 질서정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별것 아닌 풍경인데도 묘하게 잘 어울렸다. 생활 속 질서를 중시하는 도쿄 사람들의 기질이 이런 사소한 장면에서도 묻어나는 듯했다.

밤늦게 찾아간 어묵 전문 식당도 그랬다. 작은 바에는 몇 사람이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젊은 손님들의 목소리가 가끔 높아지기는 했지만, 술을 마시는 것보다 눈앞의 어묵을 하나씩 맛보는 데 더 집중하는 분위기였다. 국물을 머금은 무와 달걀, 어묵과 곤약을 천천히 골라 먹는 모습에는 관광지의 들뜬 흥분과는 다른 일상의 여유가 있었다.
이어 찾아간 곳은 조금 더 독특했다. 기왓장 위에 고기와 숙주나물 등을 올려 익혀 먹는 식당이었다. 뜨겁게 달궈진 기와 위에서 고기가 익고, 그 기름을 머금은 숙주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후쿠오카 출신이라는 주인장은 고향에서 접했던 음식을 도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이런 메뉴를 내놓게 됐다고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옛날 사쓰마 지역 사람들이 전쟁을 치른 뒤 해체한 가옥의 기와를 이용해 고기를 구워 먹던 방식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한 장의 기와 위에 지역의 기억과 이야기를 함께 요리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이런 작은 가게와 음식, 골목의 풍경 하나하나가 모여 오쿠아사쿠사를 만든다.
ADVERTISEMENT

◇ 화려한 아사쿠사…그 이면의 단정한 삶
ADVERTISEMENT
다음날 전철을 타기 위해 다시 아사쿠사 쪽으로 걸어가다가 뜻밖의 장면을 만났다. 마침 지역 활성화를 위해 열린 마쓰리가 한창이었다. 거리는 순식간에 축제의 무대로 변했다. 브라질 무희들이 현란한 몸짓으로 삼바를 추며 지나갔고, 뒤이어 일본 전통 복장을 갖춰 입은 여성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음악과 북소리가 거리를 메웠고, 행렬은 좀처럼 끝날 줄 몰랐다. 평소에도 관광객으로 붐비는 아사쿠사가 이날만큼은 더욱 요란하고 화려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전날 밤의 오쿠아사쿠사가 떠올랐다. 화려한 축제와 인파, 관광객의 카메라가 아사쿠사의 얼굴이라면 오쿠아사쿠사는 그 얼굴 뒤에 숨겨진 일상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아사쿠사가 도쿄가 외부에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라면, 오쿠아사쿠사에서는 사람들이 실제로 먹고 마시고 잠들고 아침을 맞는 도시의 속살이 드러났다.

ADVERTISEMENT
오쿠아사쿠사에서 묵었던 숙소 역시 그런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오래된 일본식 마치야였다. 도쿄 한복판에서 이런 전통 가옥에 묵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처럼 느껴졌다. 1층에는 거실이 있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침실이 나왔다.
침실 바깥으로는 작은 테라스가 이어졌고, 나무 데크 옆 좁은 정원에서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반대편에는 편백 욕조가 놓여 있었다. 도쿄의 하루를 마치고 그곳에서 시원한 물로 몸을 씻었다. 문을 열어두자 바깥 공기가 그대로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나무 잎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물을 맞고 있으니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도쿄를 이해하는 방법은 높은 전망대에 올라 거대한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아침 골목에 가지런히 놓인 빈 술병을 바라보고, 작은 어묵집의 바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만나고, 오래된 마치야에서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보는 것이 그 도시를 훨씬 가까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번잡한 아오야마 거리에서 불과 몇 걸음 안으로 들어섰을 뿐인데 어느새 도시의 소음은 잦아들고, 오래된 숲과 정원의 기운이 주변을 감싼다. 벽처럼 늘어선 대나무 옆으로 난 긴 회랑을 따라 걷다가 왼쪽으로 접어들면 미술관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깥의 번잡한 도심과 조용히 선을 긋는 순간이다. 미술관 건물은 구마 겐고가 설계했다. 길게 뻗은 처마와 짙은 색 지붕, 유리와 돌을 사용한 현대적인 건축물이지만 오래된 일본 정원 앞에서는 조금도 튀지 않는다. 오히려 정원을 위해 한 발 뒤로 물러선 건축처럼 보인다. 건물이 자연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 돌, 물과 빛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 번접한 도심 속 산수화 같은 정원…네즈미술관
도쿄 아오야마 한복판에 자리한 네즈미술관은 도쿄가 오래된 것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식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오쿠아사쿠사가 오래된 골목과 생활을 지키며 도시를 이어간다면, 이곳에서는 오래된 일본 정원 위에 현대 건축을 조심스럽게 포개 놓았다.
이곳의 진짜 매력은 건물 뒤편에 펼쳐지는 정원에서 시작된다. 평평하게 다듬어진 공원식 정원이 아니다. 길은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고 작은 연못과 개울을 따라 굽이친다.
나무 사이에서는 석등과 오래된 불상과 조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진다. 높낮이가 있는 정원 때문에 몇 걸음만 옮겨도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잘 그린 산수화 한 폭으로 직접 들어가 걷는 듯하다.특히 마음을 붙잡은 것은 개울가에 놓인 오래된 배였다. 금세라도 어디론가 떠날 것 같지는 않은 낡은 배 한 척이 물가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짙은 녹음과 물, 세월을 품은 정원,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구마 겐고의 건축물이 잘 어울렸다.

정원을 한참 걷고 나서 미술관 카페에 들어갔다.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를 하나 얻었다. 800엔짜리 가장 저렴한 케이크를 하나 주문했다.
창밖으로는 조금 전 걸었던 숲과 정원이 펼쳐졌다. 케이크 한 조각을 천천히 먹으며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오야마 한복판에서 산수화 속을 걷고, 숲을 바라보며 케이크 한 조각을 먹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복잡한 도쿄는 사라졌다. 여행에서 위안이라는 것이 거창한 데서 오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오래된 정원 한구석, 물가의 낡은 배 한 척, 그리고 혼자 앉아 먹는 800엔짜리 케이크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