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 '땅뺏기' 이어 '팔레스타인 흔적 지우기'
총리실, 자의적 법집행 비판…극우 장관 "테러범 찬양 기념물 없애야" 옹호

(카이로=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이스라엘 극우 정치인이 이스라엘군의 호위를 받으며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기념비를 파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장을 통한 '팔레스타인 땅 뺏기'를 넘어, 이제는 서안지구 내 팔레스타인인들의 물리적·역사적 흔적마저 노골적으로 지우려 한다는 논란이 불거졌다.
25일(현지시간) 일간 타임스오브이스라엘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이스라엘 집권 연정 내 극우 정당 독실한 시오니즘당 소속의 즈비 수코트 크네세트(의회) 의원은 요르단강 서안의 마다마 마을을 찾아 이른바 '순교자 기념비'를 쇠망치 등으로 직접 부쉈다.
순교자 기념비는 팔레스타인 입장에선 독립을 위해 점령세력인 이스라엘에 저항하다가 숨진 인물을 기리는 기념물이지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자국과 자국민을 공격한 테러범을 기념하는 상징물로 인식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측이 공개한 영상에는 수코트 의원 일행이 기념비를 파손하는 동안 이스라엘군 병사들이 이들을 곁에서 호위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수코트 의원은 이 기념비가 2000년대 초 이스라엘인을 겨냥한 테러에 가담했던 인물들을 기리고 있다며 "테러를 선동하는 상징물을 직접 철거한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백주에 벌어진 극우 의원의 무단 훼손 행위에 이스라엘 정치권은 즉각 술렁였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실은 성명을 내고 수코트 의원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며 공식적으로 선을 그었다.
총리실은 "서안의 주권적 권위자는 이스라엘군"이라며 "특히 공직자가 자의적으로 법을 집행하려 드는 것은 용납될 수 없으며, 군의 대테러 임무 집중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수코트 의원이 소속된 독실한 시오니즘 대표인 베잘렐 스모트리히 재무장관은 그를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스모트리히 장관은 "군은 진작에 유대인 살해범을 찬양하는 기념비를 철거했어야 했다"며 "서안 전역의 수십 개 테러 기념비 역시 군에 의해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거의 주체가 군이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면서도 수코트 의원을 비판하는 야권을 향해 "테러가 아닌 수코트 의원을 맹비난하기에 급급하다"며 화살을 돌렸다.
하지만 극우 진영 내부에서도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감지된다.
같은 당 소속 오하드 탈 의원은 당내 회의에서 수코트 의원을 겨냥해 "자살 행위를 하기로 작정한 것이냐"고 공개 질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스라엘의 서안 장악 시도는 2022년 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우파 정부'가 출범하면서 본격화됐다.
스모트리히 장관과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장관 등 대표적인 극우 성향 정치인들이 국정 주도권을 쥐면서, 국제법상 불법인 유대인 정착촌 건설은 이스라엘 정부의 묵인과 노골적인 지원 아래 급물살을 탔다.
이 과정에서 정착촌 운동가들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주거지를 불법 점거하는 '땅 뺏기'가 일상화했다.
서안에서 유대인들의 폭력은 2023년 10월 7일 가자지구 전쟁 발발 이후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고 있다. 전 세계의 시선이 가자지구에 쏠린 틈을 타, 무장한 극우 정착민들은 팔레스타인 주민을 향한 총격, 가옥 방화, 농장 훼손 등 무자비한 폭력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수코트 의원의 기념비 훼손은 이러한 폭력적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는 시각이 많다.
물리적인 주거지를 무력으로 잠식하는 단계를 넘어, 팔레스타인 공동체의 기억과 서사가 담긴 상징물마저 파괴함으로써 서안에서 팔레스타인의 정체성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meol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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