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방송의 헤즈볼라 지도자 희화화 발단
헤즈볼라 측, 마론파 총대주교 모욕 맞불
미국 대사의 총대주교 모욕 비판 발언도 기름 부어

(카이로=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에 휘말린 레바논에서 주요 종파 간 갈등이 다시 분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 민영 방송사가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의 수장인 시아파 성직자를 모바일 게임 캐릭터로 희화화한 영상을 방영하자, 헤즈볼라 지지자들이 마론파 기독교 총대주교를 모욕하는 이미지로 맞불을 놓았다.
여기에 주레바논 미국 대사의 발언까지 헤즈볼라 측을 자극하면서 상황은 계속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4일(현지시간) 레바논 언론과 외신 등에 따르면 이번 갈등은 지난 2일 레바논 민영 방송사 LBCI가 헤즈볼라 지도부와 전사들을 모바일 게임 '앵그리버드' 캐릭터로 희화화한 영상을 방영하면서 시작됐다.
LBCI는 1985년 내전 중에 기독교계 무장정파인 레바논군에 의해 설립된 레바논 최초의 민영 TV 채널로, 내전 후 독립적인 상업 방송사가 되었다.
LBCI는 헤즈볼라의 지도자나 정책을 풍자하는 코미디 코너 등으로 헤즈볼라를 비롯한 레바논 내 친이란 세력과 자주 충돌해온 전력이 있다.
헤즈볼라 지지자들은 이 영상이 자신들의 수장이자 시아파 성직자인 나임 카셈 사무총장을 조롱한 것이라며 거세게 비난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지지자들은 레바논 내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종파인 마론파의 베샤라 라이 총대주교를 모욕하는 이미지를 공유하며 맞불을 놓았다.
이는 기독교계와 정계 전반의 거센 공분을 샀다.

이처럼 종파 간 갈등이 커지는 가운데 미첼 이사 주레바논 미국 대사는 5일 라이 총대주교를 예방해 지지 의사를 밝히며 "지난 주말 발생한 일에 대해 불쾌감을 표한다"고 말했다.
이사 대사는 "공존의 나라로 알려진 레바논에서 이런 행태는 부적절하다"며 "이런 일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레바논은 적합하지 않은 곳일 수 있으니, 살기 좋은 다른 나라를 찾아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사 대사의 발언이 알려지자 헤즈볼라 측도 강력하게 반발했다.
헤즈볼라 소속 알리 암마르 의원은 성명을 통해 "주레바논 미국 대사가 레바논 사안에 노골적으로 간섭하고, 레바논 국민에게 조국을 떠나라고 종용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그는 이어 "취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치는 그를 '외교적 기피 인물'로 지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논란이 커지자 조셉 아운 대통령과 헤즈볼라의 동맹인 나비 베리 국회의장 등 레바논 고위 공직자들은 종교 지도자에 대한 공격을 일제히 비난했다. LBCI 방송은 사법 당국의 소환 조사를 받은 후 해당 영상을 삭제했다.
레바논은 다른 아랍 국가들에 비해 표현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보장되는 편이지만, 정치·종교적 인물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언론인이나 예술가들이 탄압받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해 왔다.
특히 지난 3월 2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 암살에 대한 보복으로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에 로켓을 발사하며 시작된 이번 전쟁은 레바논 내 종파 간 분열을 더욱 심화하고 있다.
이번 전쟁으로 약 2천700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의 피란민이 발생한 가운데, 레바논 정부는 헤즈볼라 무장 해제를 원하는 이스라엘과 직접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
레바논은 1975년부터 1990년까지 장기 내전 후 종파 간 세력 균형을 이유로 독특한 정치 시스템을 도입했다.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 총리는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 출신이 각각 맡는 원칙을 유지해왔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는 레바논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meol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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