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상담 등 반복 업무 자동화, 인간은 판단 역할
기업 "직무기술서 전면 재작성"…AI 활용 능력 필수

(서울=연합뉴스) 심재훈 기자 = 1일 노동절을 맞았지만 우리나라 근로자들은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직업 정체성이 불투명해지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AI가 노동 현장에 빠르게 스며들면서 '대규모 실업' 대신 '직무 세분화'라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직업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기보다는 하나의 직군 안에서 단순·반복 업무를 AI가 먼저 떼어가는 식의 재편이 속도를 내는 양상이다.
◇ '생산' 대신 '검수'…역할 바뀐 개발자와 상담원
최근 생성형 AI를 실무에 도입한 국내 주요 시스템통합(SI) 업체와 시중은행에서는 인력의 역할 재조정이 한창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IT 개발 직군이다.
과거 개발자들이 오랜 시간을 들였던 기초 코드 작성이나 단순 오류 수정은 이제 '깃허브 코파일럿' 같은 AI 보조 도구의 몫이 됐다.
AI가 뼈대를 잡고 반복적인 코드를 짜면 개발자는 전체적인 구조를 설계하거나 AI가 놓친 보안 취약점을 찾아내는 '코드 리뷰'에 집중하는 방식이다.

금융권 고객센터도 사정은 비슷하다.
단순 잔액 조회나 비밀번호 변경 같은 1차 응대는 챗봇과 보이스봇이 전담한다. 대신 상담원들은 보이스피싱 피해 구제, 복합 금융상품 상담, 상속 처리 등 절차가 까다롭고 정서적 교감이 필수적인 고난도 복합 민원에 투입되고 있다.
노동의 무게 중심이 무언가를 일차적으로 '생산'하는 단계에서 AI의 결과물을 확인하고 최종 판단하는 '검수' 단계로 이동한 셈이다.
기계가 대량으로 만든 결과물에 인간이 개입해 윤리적·구조적 변수를 통제하는 방식이 산업 현장의 표준으로 자리 잡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 "일자리 23% 구조 변화"…직무 기술서가 바뀐다
이런 변화는 국내외 주요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한국노동연구원(KLI)과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등은 AI가 직업을 소멸시키기보다 직업 내 업무 일부를 자동화하면서 '직무 재배치'를 유도한다고 분석한다.
데이터 입력이나 사무 지원 등 규칙적인 업무는 기계에 넘기고, 인간의 역할은 문제 해결과 창의성, 윤리적 판단 영역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내놓은 '미래 일자리 보고서 2023'도 궤를 같이한다.
WEF는 오는 2027년까지 전 세계 일자리의 약 23%가 AI와 자동화의 여파로 구조적 변화를 겪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AI 탓에 일자리가 무조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기계적 노동이 줄고 새로운 형태의 직무가 생겨나는 등 '업무 조합'이 바뀐다는 의미다.
한 대기업 인사 담당자는 "AI 도입으로 높아진 업무 효율이 새로운 표준이 되면서 직원들에게도 AI 툴 활용 능력과 더 높은 수준의 문제 해결력을 요구하고 있다"며 "사실상 모든 직군의 직무 기술서를 새로 써야 하는 과도기"라고 전했다.
◇ EU·미국은 'AI 고용 규제' 속도…한국은 아직
노동 시장의 지형이 흔들리면서 주요국은 '고용 알고리즘'을 제어하기 위한 제도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간 '인공지능법(AI Act)'을 통해 채용과 인사 평가 등 노동 시스템에 쓰이는 AI를 '고위험군'으로 명시했다.
기업이 이 시스템을 쓰려면 알고리즘에 차별이나 편향성이 없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고 반드시 '인간의 통제'를 거치도록 법적 의무를 지웠다.
미국 뉴욕시 역시 기업이 채용이나 승진에 AI 자동화 도구를 사용할 경우 매년 외부 기관으로부터 알고리즘 편향성 감사를 받도록 강제하고 있다. 고용 과정에 개입하는 AI의 투명성을 제도적으로 묶어둔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산업 '진흥'에 더 비중을 두는 분위기다.
올해 1월 시행된 '인공지능기본법'은 산업 경쟁력 강화와 생태계 조성 등 육성에 뼈대를 두고 있다. 고용 알고리즘의 편향을 통제하거나 AI 도입에 따른 노동권 침해를 막기 위한 구체적인 감독 규정 논의는 주요국에 비해 뒤처진 편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다가올 AI 전환기에 대비해 기술 육성 못지않게 노동 현장에 맞는 사회적 안전망과 윤리 가이드라인 구축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president21@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