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국제유가 요동…중동산 원유 의존 취약성 노출
원자재 가격 상승 여파…건설·건자재 업계 공사비 부담 확대
정부, IEA와 공조해 비축유 2천246만배럴 방출…석유 최고가격제 등 시장 안정 총력

(서울=연합뉴스) 조성흠 신창용 홍국기 기자 = 2주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미국·이란 전쟁 여파로 국제유가가 한때 배럴당 120달러에 육박하면서 국내 산업계도 전력과 원자재, 물류비용 등의 상승으로 비상이 걸렸다.
항공과 석유화학 등 유가 민감 업종은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았다. 국가 주력 산업이자 전력 소비가 많은 반도체까지 영향권에 들면서 전쟁 장기화에 따른 산업계 전체의 손실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으로 우려된다.
사태가 긴박해지자 정부는 국제유가 안정을 위한 국제 공조에 나서는 한편 국내 유가 폭등을 막기 위해 이번 주 최고가격제와 매점매석 고시를 하고, 추가경정예산 등 가용한 모든 정책 수단을 가동해 기름값을 안정시킨다는 방침이다.

◇ 유가 급등에 항공·석유화학 '직격탄'…반도체·자동차도 부담
중동산 에너지 의존도가 큰 우리 산업계는 이번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이 러시아산 가스 의존 문제로 겪었던 '에너지 대란'이 우리나라에서도 재연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특히 세계 석유 물동량의 약 20∼30%가 지나는 핵심 수송로이자 우리 에너지 수송의 '대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중동산 원유 도입 비중은 70%에 달했는데, 이 중 95%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했다.
지리적 여건상 대체 수송로 확보가 쉽지 않고, 원유의 장기 계약 비중이 높아 도입선 전환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분석된다.
국제유가 급등은 에너지 원가 상승과 광범위한 비용 부담으로 이어질 조짐이다.
항공업계는 유류비 비중이 영업비용의 30%가량을 차지해 고유가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 업종 중 하나로 꼽힌다.
대한항공의 경우 유가가 1달러만 올라도 연간 3천50만달러(약 450억원)의 손해가 발생한다.
전쟁 전 70달러 선이던 국제유가가 한때 100달러를 넘긴 것을 고려하면 불과 1주일 새 약 1조4천억원의 연간 추가 손실이 우려되는 것이다.
항공업계는 유가 헤지(위험회피) 확대와 함께 유류할증료 인상 등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이는 여객 수요 감소로 이어질 수 있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이미 공급 과잉으로 한계 상황에 부닥친 석유화학업계는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원재료인 유가가 오르면 제품값을 올려야 하지만 전쟁 불안 심리로 수요 침체가 더욱 심화하는 상황에서 가격 인상도 쉽지 않아서다.
이에 여천NCC는 통제 불가능한 외부 요인에 따른 계약 미이행 면책 조치로서 '공급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비축분이 소진되는 다음 달에는 연쇄적인 불가항력 선언이 이어지고 최악의 경우 공장 가동 중단 사태까지 벌어질 수 있다.
반도체와 자동차 등 주력 산업도 비상이다.
2022년 이후 산업용 전기요금이 이미 70%가량 인상된 상황에서 요금 추가 인상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증산에 박차를 가하는 반도체 업계는 전기료 부담이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어 걱정이다.
자동차업계 역시 고유가로 인해 내연기관차에 대한 소비심리 위축을 우려하며 긴장하고 있다.
정유 및 해운업계도 단기적 마진 개선 효과와 별개로, 중장기로는 내수 부진과 수요 둔화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유가 급등이 지속될 경우 차량 운행과 여행 수요가 감소하고 글로벌 물류가 둔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철강·시멘트·운송비 줄줄이 상승…건설업계 수익성 악화 우려
국내 건설·건자재 업계도 원가 관리 불확실성으로 시름이 깊다.
유가·천연가스 가격이 오르면 철강, 시멘트 등 건설 자재 생산비와 장비 운용비, 운송비까지 연쇄적으로 상승하기 때문이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국제 유가가 60% 상승할 경우 건축물과 일반 토목 시설의 공사비는 각각 1.5%, 3%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일부 레미콘 제조사들은 운송 사업자의 유류비를 전액 부담하는 구조라 최근 유가 급등은 수익성 악화로 이어지는 수순이다.
시멘트 업계도 시멘트 생산 원가의 25% 안팎을 차지하는 유연탄 가격의 상승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히 이번 유가 급등 이전부터 이미 건설 공사비가 가파르게 올라 업계의 시름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건설 물가 지표인 건설공사비지수는 올해 1월 133.28로, 통계 발표 이후 월별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처럼 이미 자재비·인건비 상승으로 공사비 부담이 큰 상황에서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까지 더해지면서 업계의 수익성 악화뿐만 아니라 주택 정비 사업과 분양 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관측된다.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이은형 연구위원은 "위기가 장기화할 경우 건설 공사의 비용 상승은 불가피하다"며 "공공 발주라도 계획된 공사비 범위를 넘어서면 유찰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이 연구위원은 "공공 공사 유찰과 민간 정비 사업의 지연을 피하려면 물가 상승분을 공사 예정 가격에 적절히 반영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 IEA와 공조해 전략 비축유 공동 방출 추진…국내는 최고가격제 카드
정부는 지난달 28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급등한 유가에 대응하기 위해 국제 공조와 국내 시장 통제를 병행하는 '투트랙' 대응에 나섰다.
정부는 11일(현지시간) 국제에너지기구(IEA) 긴급 이사회에서 결의한 총 4억배럴 규모의 비축유 공동 방출에 동참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방출 물량은 전체 4억배럴의 5.6%에 해당하는 2천246만배럴로 역대 최대 규모다.
국가별 방출 물량은 IEA 32개 회원국 전체 석유 소비량에서 개별 국가가 차지하는 소비량에 비례해 산정됐다.
정부는 우리나라 여건에 맞춰 국익 관점에서 방출 시기, 물량 등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 IEA 사무국과 협의해 나갈 예정이다.
국내적으로는 이번 주에 석유 최고가격제를 전격 시행한다.
1997년 유가 자유화 조치 이후 정부가 시장 가격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싱가포르 원유 현물시장 가격 평균에 일정 마진을 더해 정유사 공급가 상한선을 정하는 방식이 유력하게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정유사 공급가격 통제 시 우려되는 '공급 절벽' 사태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도 가동한다.
정부는 '매점매석 고시'를 통해 정유사가 생산량의 일정 비율 이상을 반드시 국내 시장에 판매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아울러 정부는 정유사의 손실 보전과 유류세 인하, 취약계층 지원도 병행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추가경정예산 편성까지 고려하고 있다.
전략 비축유 방출을 통한 공급 확대와 최고가격제를 통한 가격 통제가 동시에 시행될 경우 단기적인 유가 상승세를 억제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둘 것으로 전망된다.
중동 지역 수출 중소·중견기업들을 위한 범정부 차원의 지원도 강화한다.
산업부는 중동 수출 애로 통합 관리체계를 즉시 가동하고 물류비 지원 확대 및 정책금융기관 유동성 지원 강화 등 수출 차질 최소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한때 120달러까지 육박했던 국제유가는 다시 80달러대로 복귀했지만 호르무즈 해협 주변의 위기감이 여전해 긴장의 끈을 놓기 어려운 상황이다.
원자재 데이터 업체 케플러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곧장 풀린다고 해도 걸프 해역(페르시아만) 석유 수출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는 6∼7주가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josh@yna.co.kr, changyong@yna.co.kr, redfla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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