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실드' 약화 우려…야당 "'반도체 국보법' 만들어 기술유출 막겠다"
124조원 규모 구매약정에 "일방 조공" 비판…의약품·자동차 개방도 쟁점

(서울=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미국과 대만이 지난 12일 상호관세 인하와 시장 개방·투자 확대를 골자로 하는 무역 협정을 체결했지만 대만에서는 세부 내용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합의로 미국은 대만산 제품에 부과하는 관세율을 20%에서 15%로 인하하고 대만은 관세 장벽의 99%를 철폐하거나 줄이고 자동차·농축산물에 대한 우대시장 접근을 제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대만이 미국에 약속한 2천500억달러(약 362조원) 규모의 직접투자 가운데 1천억달러(145조원)를 대만 TSMC가 추가로 부담해 미국에 신규 공장을 건설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자, 대만 야당은 '반도체 국가보안법'을 추진해 해외 공장 설립 규모를 제한하겠다고 나섰다.
야권은 또한 '국내총생산(GDP) 3% 국방 지출'과 대규모 구매 약정 조항, 의약품·승용차 개방 등도 문제 삼고 있다.
◇ TSMC 1천억달러 추가 투자 가능성에…야당 "산업공동화 막겠다"
18일 대만매체 등 외신에 따르면 이번 무역협정의 최대 쟁점은 2천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직접투자 계획이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보도자료를 통해 대만과 무역 합의를 했다며 대만 반도체·기술 기업들이 미국에서 첨단 반도체, 에너지, 인공지능(AI) 생산·혁신 역량을 구축·확대하기 위해 2천500억달러 규모의 신규 직접투자를 한다고 밝혔다.
대만 기술기업들은 그 대가로 미국의 반도체 관세를 면제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천500억달러 투자의 세부 정보가 공개되지 않아 그중 대부분을 담당할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 TSMC에 미칠 영향에 물음표가 남았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14일(현지시간) 복수의 소식통과 업계 관계자들을 인용해 이번 무역협정과 관련, TSMC가 이전에 발표한 대미 투자 외에 1천억달러를 더 부담해 미국에 반도체 공장 4곳을 추가로 건설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이번 협정의 기반이 된 2천500억달러 대미 투자에 TSMC가 지난해 3월 발표한 1천억달러 투자 계획과 TSMC 공급망 관련 300억달러, 폭스콘 등 다른 대만 기업의 미국 내 서버 조립공장 확장과 관련한 200억달러 등 1천500억달러가 포함됐다고 전했다.
남은 1천억달러는 결국 TSMC가 메우게 될 전망이다. FT는 TSMC 투자계획을 잘 아는 소식통을 인용해 TSMC가 미국 내 팹 4곳을 추가로 건설하는 데 1천억달러를 더 투자할 것이며 이는 2천500억달러 중 '공백'으로 남은 1천억달러와 일치한다고 짚었다.
TSMC는 이미 지난해 3월 발표한 1천억달러 등 대미 투자액을 총 1천650억달러로 확대해 미국에 웨이퍼 공장 6곳과 패키징 공장 2곳, 연구개발(R&D) 센터 1곳을 짓겠다고 밝힌 상태다.
대만에서는 이같은 대규모 대미 투자가 이뤄지면 대만 반도체 산업이 공동화하고 '실리콘 실드'(반도체 방패)가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리치쩌 국립장화사범대 부교수는 중국시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무역협정 중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대만 '실리콘 실드'에 대한 충격이라고 지적했다.
리 교수는 미국 등 해외로 대만 반도체 생산능력이 분산될 경우 "장기적으로 대만 '실리콘 실드'의 독점적 지위가 약화해 '대체 불가능'에서 '중요하지만 대체 가능한'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말했다.
대만 제1야당인 국민당은 미국과의 무역협정으로 대만 반도체 산업이 공동화 위기에 놓였다면서 '반도체 국가보안법'(晶片國安法)을 제정해 이를 막겠다고 나섰다.
원내 1당인 국민당은 '반도체 국가보안법'을 통해 "대외 기술 수출은 '대만보다 한세대 뒤처진' 것만 하도록 명문화하고 해외 공장 설립 규모를 제한하며, 국회 동의 없이는 핵심기술을 이전할 수 없게 하겠다"고 강조했다.
◇ 국방비 GDP 3% 이상, 124조원 구매약정 등 논란
국민당과 민중당 등 야당은 미국-대만 무역협정문에 '연간 국방비 지출이 GDP의 3%를 넘게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도 비판하고 있다.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미국의 방위비 증액 요구 속에 이전부터 GDP 대비 국방비 비중을 3% 이상으로 높이겠다고 강조해왔다. 그는 지난 13일 미국과의 무역협정 관련 기자회견에서도 올해 국방예산이 GDP의 3%를 넘었고 향후 집행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이런 방침은 무역 협상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과의 무역협정이 국가 재정지출 비율을 구속할 권한이 있는지, 국방비 증액으로 다른 예산이 잠식될 가능성은 없는지 등을 두고 야권을 중심으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자유시보는 야당에서 이 부분을 문제 삼아 협정 수정을 요구하거나 입법원(의회) 심의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미국과 재협상해야 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대만이 2029년까지 미국으로부터 2조7천억 대만달러(124조원) 규모의 천연가스, 원유, 항공기 및 항공기 엔진, 전력망 장비와 발전설비 등을 구매하기로 약속한 것도 야당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국민당은 미국이 이와 대등한 수준의 구매 약속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는 일방적 조공"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산 의약품 수입과 미국산 승용차 수입쿼터·관세 철폐 조항에 대해서도 비판이 나온다.
대만은 이번 협정으로 미국에서 제조된 의료기기와 의약품에 대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판매 허가를 추가 수입 요건 없이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또 미국산 세단에 대해서는 대만 수입업자에 부여되는 연간 수입 가능 대수(쿼터)가 없어지고 관세율은 기존 17.5%에서 '0%'가 된다.
대만 정부는 이번 협정이 내달 입법원 심의·통과 후 4월께 시행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미국산 수입차 관련 소비자의 총 세금 부담이 약 10% 감소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하지만 이처럼 대만이 미국산 차량이 무관세 혜택을 주게 되면 유럽이나 일본 등 주요 자동차 생산국으로부터 관세 인하 압박이 커질 것이라고 중국시보는 전했다.
대만에 일본은 경제·안보 양면에서 중요한 역내 우방이고 유럽연합(EU)은 주요 수출시장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동일한 조건을 요구할 경우 거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린쭈자 대만 정치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규모 대미 구매약속으로 향후 협상 카드가 줄었고, 자동차와 의약품 개방과 관련한 산업 영향 평가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며 "미국 의약품이 대만에 판매될 경우 우리는 심사할 권리가 없다. 이는 자발적으로 권한을 포기한 것"이라고 중국시보에 말했다.
inishmor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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