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파, 21세기 들어 첫 총선 제1당…국민, 연속성·안정성에 높은 평가
캄보디아와 교전 사태에 조기총선 결단 먹혀…'온건 개헌' 움직임 탄력

(하노이=연합뉴스) 박진형 특파원 = 태국에서 지난 8일(이하 현지시간) 열린 총선에서 아누틴 찬위라꾼(60) 현 총리가 이끄는 품짜이타이당이 제1당을 차지하면서 20년 만에 연임하는 첫 태국 총리가 될 것이 유력시된다.
이에 따라 2006년 군사쿠데타 이후 지금까지 9차례 총리가 바뀐 태국의 만성적인 정치 불안이 어느 정도 해소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 아누틴, '탁신 왕조' 끝내고 20년 만의 첫 연임 총리 눈앞
현지 방송 타이PBS에 따르면 9일 오후 12시 50분 기준으로 개표가 94.0% 진행된 가운데 비공식 집계 결과 품짜이타이당이 하원 500석 중 193석(38.6%)을 얻어 의석수 기준 제1당에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진보 성향 국민당은 118석(23.6%), 탁신 친나왓 전 총리 가문의 프아타이당은 74석(14.8%)으로 각각 제2당, 제3당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태국 총선에서 왕실과 군부의 지지를 받는 보수 정당이 1당에 오른 것은 1996년 총선 이후 처음이다.
앞서 2001년 총선에서 탁신 전 총리가 승리, 집권한 것을 시작으로 탁신 전 총리 계열 정당은 2019년까지 다섯 차례 총선에서 모두 제1당을 차지하는 불패 기록을 썼다.
2023년 총선에서는 국민당의 전신인 전진당(MFP)이 제1당에 올랐지만, 보수 세력의 비토로 연립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제2당인 프아타이당이 집권했다.
왕실·군부의 지지를 받지 않은 탁신 전 총리 계열 정당의 연속 집권에 보수파는 한 차례의 군사 쿠데타, 보수 세력의 아성으로 꼽히는 헌법재판소의 다섯 차례 판결로 이들 당 소속 총리 6명을 줄줄이 쫓아냈다.
총선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보수파가 선거 외의 방식으로 탁신 전 총리 측 총리들을 몰아낸 것이다. 이에 따라 태국은 지난 20년간 9차례 총리가 바뀌는 지속적인 정치 불안에 시달려왔다.
그러나 이제 품짜이타이당이 주도하는 연립정부가 수립되고 아누틴 총리가 2006년 쿠데타로 쫓겨난 탁신 전 총리 이후 첫 연임 총리가 되는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이번에 품짜이타이당과 연대한 끌라탐당도 58석(11.6%)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데다가 프아타이당도 품짜이타이당 연정에 참여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태국이 21세기 이후 겪어온 정치 파행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은 투표 전날인 지난 7일 아누틴 총리를 접견, 품짜이타이당에 무게를 실어줬다.
태국 출랄롱꼰대 정치학과 티띠난 뽕수티락 교수는 블룸버그 통신에 "사람들은 연속성, 안정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며 "때로는 '익숙한 악마'가 공존할 수 있는 상대일 수 있다"고 밝혔다.
또 "국왕의 (아누틴 총리와) 깜짝 만남은 중요했다"고 덧붙였다.

◇ 건설사 가문 출신 아누틴, 노련한 협상력으로 정치 입지 강화
태국과 캄보디아의 국경 지대 교전이 격화하던 지난해 12월 11일 아누틴 총리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나는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짧은 메시지로 조기 총선 실시를 선언했다.
캄보디아와의 무력 충돌로 태국에 퍼진 민족주의 바람을 타기 위해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아누틴 총리는 지난달 유세에서 "나는 내 목숨으로 태국을 지키겠다고 약속한다"며 "나라를 지키고 우리 땅을 모두 지키기 위해 품짜이타이당을 선택해 달라"고 호소했다.
국왕에 대한 충성과 국방력 강화를 내세운 아누틴 총리의 선거 운동은 군 장성 감축 등 반(反)군부 노선을 강조한 국민당과 대조를 이루며 여론에 어필했다.
교전에서 태국군은 태국 동부 사깨우주와 캄보디아 북서부 반띠어이미언쩨이주 국경 지대를 비롯한 여러 분쟁 지역의 수㎢ 영역을 점령하며 민족주의 여론을 키웠다.
전날 밤 개표 결과를 접하고 고무된 아누틴 총리는 기자들에게 "품짜이타이당 당원 모두의 마음속에는 민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며 "우리 국민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 이상을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아누틴 총리는 태국 제2 건설회사 시노-타이 엔지니어링·건설(스테콘 그룹)의 중국계 태국인 오너 가문 출신이다.
스테콘 그룹을 창업한 부친 차바랏 찬위라꾼(90)은 과거 내무부·보건부 장관을 지냈고 2008년 보름 동안 총리 대행을 맡기도 했다.
아누틴 총리는 스테콘 그룹을 운영하다가 2004년 탁신 총리 내각에서 공중보건부 차관을 맡아 정계에 입문했다.
2012년부터 부친의 뒤를 이어 품짜이타이당을 이끌면서 선거에서 차츰 의석을 늘려 정치권 기반을 넓혀갔다.
이후 2019∼2023년에는 군 출신 독재자인 쁘라윳 짠오차 총리의 내각에 보건부 장관으로 참여했다.
2023년 총선에서는 71석을 얻어 품짜이타이당을 전진당, 프아타이당에 이은 제3당에 올리면서 보수파 '킹메이커'로서 입지를 확실히 굳혔다.
군주제 보호를 내세워 총리 투표에서 전진당의 집권을 막았고 프아타이당 연정에 참여, 자신은 부총리 겸 내무부 장관을 맡았다.
그러다가 작년 5월 말 탁신 전 총리 딸인 패통탄 친나왓 총리가 캄보디아 실권자 훈 센 상원의장 상대로 저자세로 통화한 내용이 유출되자 그는 신속히 연정에서 이탈, 보수층에게 자신을 부각시켰다.
이후 작년 8월 패통탄 총리가 헌재 판결로 물러나자 개헌 추진 약속을 고리로 전진당 후신 국민당과 손잡고 총리 투표에서 승리, 집권에 성공했다.
이처럼 노련하고 폭넓은 협상력을 바탕으로 이번 총선을 앞두고 프아타이당 등 다른 당에서 현역 의원 64명을 끌어들여 이들의 선거 운동 조직을 흡수하며 선거 승리를 이끌었다.

◇ 정치 안정에 시장 기대감…개헌, 국민투표 찬성으로 탄력
아누틴 총리는 재집권에 성공해도 경제 부진과 급속한 인구 고령화 등 구조적 난관에 부닥친 태국 국가 시스템을 되살리는 어려운 과제를 떠맡게 됐다.
20세기 한국·대만 등의 뒤를 이어 떠오르는 아시아 신흥공업국으로 주목받던 태국 경제는 21세기 들어 계속되는 정치 불안 속에 성장 정체에 빠졌다.
태국 재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이웃 베트남(8.02%)의 거의 4분의 1 수준인 2.2%에 그친 것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아누틴 총리의 연임 전망으로 기업과 시장은 일단 안도감을 갖게 됐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이들은 누가 정권을 잡는지보다 태국 정치 결과의 불확실성을 더 우려한다는 것이다.
정부 정책 연속성에 대한 기대감에 방콕 증시를 대표하는 태국증권거래소(SET) 지수는 이날 오후 현재 약 3.3% 상승했다.
한편, 총선과 함께 실시된 개헌 추진 찬반 국민투표에서는 찬성이 59.77%로 반대(31.57%)를 압도, 개헌이 탄력을 받게 됐다.
이런 결과는 헌재 등 선출되지 않은 기관의 막강한 권력 축소를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는 국민당 등의 주장에 국민이 호응한 것으로 풀이된다.
품짜이타이당과 프아타이당 다른 주요 정당들도 개헌의 필요성 자체는 동의하고 있지만, 내용과 절차 면에서는 각자 차이가 있다.
국민당은 군사정권 당시 만들어진 현행 헌법을 국민이 선출한 헌법제정위원회를 통해 전면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비해 프아타이당은 군주제 조항을 유지하는 개헌을 주장하고 있으며, 품짜이타이당은 모든 이해 관계자가 수용할 수 있는 신중하고 포용적인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집권 품짜이타이당 주도로 대체로 온건한 수준의 개헌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jhpark@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