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에 유사 제도 있어…보편성 측면에서 한국의 독특한 제도
'사금융+주거+부동산 상승 기대' 복합…2015년부터 월세 >전세
(서울=연합뉴스) 성혜미 기자 = 내 집 마련을 위한 '주거 사다리'로 주목받던 전세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전세는 보증금을 맡기고 남의 집을 빌린 뒤 계약기간이 끝나면 보증금을 돌려받는 주택임대차 유형이다.
'사(私)금융+주거+부동산 상승 기대'가 결합한 독특한 제도다.
집주인은 금융권에서 돈을 빌리는 대신 전세금을 받아 무이자로 융통하고, 세입자는 목돈을 보증금으로 내고 이를 내 집 마련을 위한 징검다리로 활용했다.
해외에서는 월세가 일반적인 탓에 한국에서 집을 구하는 외국인들은 '본인 집에 몇 년 살다 나가는데 왜 사용료(월세)도 안 받고 돈(보증금)을 그대로 돌려주느냐'며 의아해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전세 제도는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전세제도는 실제 우리나라에만 있는지, 전세제도는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전셋집이 사라지는 이유 등을 살펴봤다.

◇ 전세는 한국에만 있다고?…볼리비아에 유사 제도 있어
전세 제도는 한국에만 있다는 주장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외국에 이와 유사한 제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전세 제도와 실질적으로 유사한 해외 사례로는 볼리비아·안데스 지역의 '안티크레티코'(Anticretico)가 꼽힌다.
이 제도는 임차인이 목돈을 일시금으로 집주인에게 지급하고, 월세가 따로 없으며 계약 종료 때 일시금을 전액 반환한다는 점에서 전세제도와 유사하다.
김진유 경기대 도시교통공학과 교수는 국토연구원이 발행한 '국토연구' 제85권에 게재한 '전세의 역사와 한국과 볼리비아의 전세제도 비교분석'(2015) 논문에서 "실제 시장에서 전세가 관찰되는 나라는 한국, 볼리비아, 인도 등 3개국"이라며 "인도는 아주 극소수 지역에서 특수하게 나타나는 형태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 논문은 "우리나라의 전세 비중과 비교해 볼리비아의 전세(안티크레티코)는 (2012년 기준) 3% 내외로 보편성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지만 보증금만 내고 월세를 받지 않는 점 등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계약방식"이라고 설명했다.
보편성 측면에서 한국의 전세는 주택 임대차 시장의 주된 계약 형태고 제도화됐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독특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 전세제도 어떻게 시작됐나…조선 후기 등장
이런 한국의 독특한 전세제도는 어떻게 시작했을까.
우리나라의 전세는 조선 후기 상업화 과정에서 관행으로 등장해 일제 강점기와 1960∼1970년대 금융 미발달·고성장 환경 속에서 한국 특유의 주거 제도로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의 '전세 제도의 이해와 시장변화'(2016) 보고서를 보면 고려 시대 논밭을 담보로 맡기고 재물을 빌리던 전당(典當) 제도가 조선 시대에 주택을 활용한 가사전당(家舍典當) 형태로 발전한 것이 전세의 유래라는 견해가 있다.
조선시대 환퇴(還退) 유래설도 있다. 환퇴는 채무자가 주택·토지를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렸다가 채무를 변제하고 되찾아 오는 것을 의미한다.
두 견해 모두 전세 관습 형성 시기를 19세기로 추정한다.
또 최영상 주택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전세의 원형, 조선후기 세매관습의 특성에 관한 분석'(2024)에서 1700년대(18세기)를 전후로 존재한 세매(貰賣) 유래설을 주장했다.
세매는 '세를 놓다'는 의미로, 목돈을 '세전'(貰錢)으로 받는 대신 집을 빌려주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세전을 돌려받는 형태다.
최 위원은 조선 영조와 정조 시기 '승정원일기'에서 세매와 관련한 내용을 근거로 제시했다.
승정원일기 947책(1742년)에는 광성부원군의 자손들이 궁핍한 사정으로 가문의 본가를 세로 팔아(貰賣) 낙향했고, 영조가 이를 측은히 여겨 400냥을 지원해 그 본가를 찾아주라는 내용이 담겼다.

또 다른 견해도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만든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부산·인천·원산 등 3개 항구 개항과 일본인 거류지 조성, 농촌인구의 이동 등으로 서울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전세 제도가 생겼다고 기록했다.
이후 6·25전쟁과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의 주택난이 심화하면서 전세 제도가 완전히 자리 잡았다는 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설명이다.
전세에 대한 언급은 1912년 조선총독부의 관습조사보고서에도 나온다.
보고서에는 '전세는 조선에서 가장 일반적인 가옥 임대차 방법이다. 차주가 일정한 금액을 소유자에게 기탁하며 별도의 차임을 지불하지 않고 반환 시 기탁금을 돌려받는다'는 내용이 있다.
일제 강점기 전세 기간은 지방에서는 통상 1년, 한성부(서울)에서는 100일이었고, 보증금은 가옥 가격의 절반 또는 70∼80%를 받았다.
1981년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공포되면서 전세 세입자는 명확한 법적 보호 대상이 됐다.
당시 최저 임대차 계약 기간을 1년으로 정했다가 1989년 말 계약기간을 2년으로 늘렸다. 확정일자와 보증금 우선변제 같은 '안전장치'도 추가됐다.

◇ 월세 중심으로 임대차 시장 재편
이렇듯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의 전세 제도는 점차 힘을 잃어가는 분위기다.
5년 단위로 이뤄지는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를 보면 전체 가구 중 전세 비중은 1975년 17.3%에서 1980년 23.9%, 1985년 23.0%, 1990년 27.8%, 1995년 29.7%까지 늘었다.
그랬던 것이 2000년에는 27.4%, 2005년 21.0%, 2010년 21.7%, 2015년 15.5%, 2020년 15.5%까지 줄었다.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임차 가구만 따로 떼서 전세 가구 비율을 보면 1995년 67.2%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월세가구가 늘기 시작하면서 2000년에는 65.7%. 2005년 54.1%, 2010년 50.3%, 2015년 39.5%, 2020년 39.9%로 줄었다.
아직 202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연도별 '한국복지패널 조사·분석 보고서'를 보면 2020년대 이후 전체 가구 중 전세 비율은 2021년 13.47%, 2022년 11.38%, 2023년 11.24%까지 감소했다.
대법원 등기정보광장의 연도별 확정일자 부여 현황을 보면 지난해 확정일자를 받은 임대차거래 중 전세는 36.8%, 월세는 63.2%로 나타났다.
국가데이터처 국가통계연구원의 '한국의 사회동향 2025'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월세 비중이 전세 비중을 앞지른 후 그런 흐름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이 보고서는 월세 비중이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임대주택 시장에서 전세의 자산축적 기능과 안정성, 내 집 마련의 사다리 역할이 약화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이어 "2015년 이후 월세가 전세를 앞지른 흐름은 경기악화, 금리 상승, 전세사기 증가, 1∼2인 가구 급증 등 복합요인에 따른 것"이라며 "이는 임차 가구가 매달 더 큰 주거비 부담과 불안정성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특히 전세 사기 건수가 크게 늘어난 2022년 이후 월세 계약이 많아지고, 집주인 측에서도 고금리 영향으로 월세를 선호하게 되면서 월세 물건의 비중이 커진 것도 원인으로 해석했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 부동산정책연구원의 신광문 책임연구원은 전세가 갈수록 줄어드는 이유에 대해 ▲ 정부의 전세자금 대출 규제 강화 ▲ 실거주 의무 강화와 세제 규제에 따른 전세 낀 주택 구매(갭투자) 제한 정책 ▲ 전세사기 여파 ▲ 신규 주택 공급부족을 꼽았다.
신 책임연구원은 "정부의 전세자금 대출 규제 강화로 보증금 마련이 어려워진 임차인과 보증금 증액분을 월세로 돌리려는 임대인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보증부 월세'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갭투자는 신규 전세 매물을 공급하는 주요 통로였는데 이 경로가 차단됐다"며 "대규모 전세사기 트라우마로 보증금 미반환 공포가 확산했고, 신규 주택 물량이 역대급으로 감소하면서 전세 물량 또한 감소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전세제도에 대한 전망을 장·단기로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단기적으로는 당분간 전세 거래가 감소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일정 기간 이후 다시 활성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신 책임연구원은 "목돈이 들어가는 국내 주택시장 특성상 전세는 여전히 내 집 마련을 원하는 무주택자들에게 가장 유효한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며 "다만 주택시장 트렌드가 변하면서 기존보다 거래가 활성화되지 못할 수 있지만, 일정 수요에 기반해 명맥을 이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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