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생인가 킹메이커인가…AI 시대 기로에서 하드웨어 제왕 선택에 주목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권영전 특파원 = 애플은 지난해 인공지능(AI) 경쟁에서 완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야심 차게 공개했던 음성비서 '시리'의 차세대 버전은 약속된 시점에 출시하지도 못했고, 그 책임자였던 존 지낸드리아는 교체당하는 수모 끝에 은퇴했다. 공들여 준비한 '애플 인텔리전스'도 출시 이후 시장 반응이 무덤덤했다.
기반 모델(파운데이션 모델)의 개발팀은 팀장을 필두로 해 대거 메타로 자리를 옮기며 인재 유출 우려도 커졌다.
2024년 말 250달러를 넘겼던 애플 주가는 이와 같은 실망감 속에 지난해 4월 160달러대로 급락했다.
하지만 이 모든 '실패' 속에서 애플은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애플의 2025 회계연도 연간 매출액은 4천160억 달러(약 600조원)에 달했고, 팀 쿡 최고경영자(CEO)는 이런 성장세가 2026년에도 이어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아이폰17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애플은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줄곧 선두였던 매출액 기준 순위뿐 아니라, 판매(출하) 대수 기준 순위에서도 14년 만에 1위 자리에 올랐다.
애플 주가는 지난해 말 사상 최고인 288.61달러를 기록해 연저점 대비 70% 이상 올랐다.
그 사이 시장의 평가는 뒤집혔다. 애플을 'AI 지각생'이라고 비아냥대던 시장은 언젠가부터 '킹메이커'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극적인 여론 반전이 일어난 것은 'AI 거품론'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구글과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등 경쟁 기업들은 2022년 챗GPT 출시 이후 AI 인프라에 수천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는 "과잉투자보다 과소투자가 오히려 더 위험하다"며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고, 거대 기술기업들은 현금뿐 아니라 채권까지 앞다퉈 발행해 '빚투'에 돌입했다.
반면 애플은 한 발 비켜나 있었다.
애플의 2025 회계연도 연간 자본지출(Capex)은 127억 달러로, 구글의 연간 지출액 920억 달러나 메타의 지출액 710억 달러와 엄청난 격차를 보인다. MS의 분기 지출인 349억 달러보다도 적다.
그 결과 애플은 다른 어떤 경쟁사보다 재무적으로 안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024년 애플 인텔리전스를 발표했을 때 오픈AI의 챗GPT를 자사 제품에 도입했던 애플은, 이번에는 구글 제미나이를 채택해 막대한 연구개발비와 인프라 투자 없이 최상위 AI 기술을 확보하는 등 진짜 킹메이커가 된 것 같은 모양새를 보였다.
AI 인재의 대량 이탈이 애플의 실패가 아니라 선택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소프트웨어를 총괄하는 크레이그 페더리기 수석부사장이 자체 모델 대신 외부 AI 모델 도입을 검토해보라고 지시하면서 기반 모델 개발팀이 떠났다는 것이다.
페더리기 수석부사장은 AI 인재 확보를 위해 경영진보다 높은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는 데도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일부 팀원의 진급 요청을 거절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애플이 구글 검색은 물론이고 페이스북·인스타그램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유튜브·틱톡과 같은 동영상 서비스도 만들지 않았지만 여전히 플랫폼의 지배자라는 점을 지적한다.
도리어 애플은 구글을 자사 기기에서 기본 검색엔진으로 설정해두는 것만으로 연간 200억 달러의 수익을 얻기도 했다.
실제로 애플은 20억 대에 달하는 자사 기기 생태계와 충성 고객을 바탕으로 어떤 협상 테이블에서도 강자의 지위를 보유한다.
그러나 AI가 검색이나 SNS 등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은 여전히 애플에 중대한 위협으로 남아있다.
검색은 필요할 때만 이용하고, SNS는 개인의 선택에 따라 접속하지만 AI는 기기 전체에 스며들어 이용자가 경험하는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애플의 외부 AI 모델 의존은 팀 쿡 CEO의 평소 소신과도 거리가 있다. 그는 2009년 실적발표 당시 "우리는 우리가 만드는 제품의 핵심 기술을 직접 보유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한 바 있다.
애플은 이와 같은 철학을 바탕으로 'M' 시리즈라는 자체 칩을 개발해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경험도 있다.
지금과 같은 애플의 'AI 신중론'은 AI 경쟁이 끝나고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면 부메랑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넓은 해자를 판 견고한 성처럼 보이는 애플의 하드웨어 시장 지배력도 AI 시대에는 수성을 마냥 장담하긴 어렵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진정한 전쟁은 오픈AI와 애플 사이에서 벌어질 것"이라며 "사람들이 AI를 이용하는 방식에 기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예견한 바 있다.
오픈AI는 이미 과거 애플을 상징했던 디자이너 조니 아이브를 영입해 AI 기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르면 연내에 공개할 전망이다.
메타와 구글도 스마트 안경을 내놓으며 하드웨어 시장에서 애플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결국 애플도 이에 대응해 옷에 부착할 수 있는 동전 크기의 AI 기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애플도 마냥 AI를 도외시할 수 없었던 셈이다.
애플의 하드웨어 시장 장악력의 핵심인 부품 공급망에서의 지위도 AI 열풍의 여파로 흔들리고 있다.
10년이 넘는 기간하드웨어 업계의 큰손으로 대접받던 애플은 AI 시대로 접어들면서 엔비디아나 여타 AI 기업들에 밀리는 모양새다.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인 TSMC에 가장 중요한 고객은 이제 애플이 아니라 엔비디아가 됐다. 애플의 오랜 제조 파트너인 폭스콘도 이제 AI 서버 시장에서 더 높은 수익을 올린다.
최근에는 AI 열풍에 따라 칩 기판 제조에 쓰이는 고급 유리 섬유 공급이 달리자 애플이 직원을 소규모 공급업체에 직접 파견하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고 닛케이 아시아가 전하기도 했다.
이런 시점에서 공급망 관리의 대가로 평가받는 쿡 CEO의 은퇴설이 도는 것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연예인과 애플 걱정은 하는 게 아니다'라는 격언 아닌 격언이 있다.
역량과 자원이 풍부한 이들은 겉보기엔 어려워 보여도 자신들에게 닥친 일을 결국 잘 헤쳐 나갈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일 게다.
실제로 애플은 창업자 스티브 잡스 사후 세간의 우려를 불식하고 크게 성장했고, 매년 반복되는 '혁신은 없었다' 비판 속에서도 꾸준히 최고 실적을 증명해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재편되는 AI 시대를 맞은 데다 경영진 교체 시기까지 임박한 지금은 상황이 다를 수 있다.
AI 시대의 기로에서 애플의 선택이 주목받는 이유는 십수 년간 전 세계 하드웨어 업계의 기준점이 돼왔던 애플이 거대한 실험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 AI 모델에 의존하고도 플랫폼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가, 최소한의 투자로 최고의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가를 검증하는 이번 실험의 성패가 기술 산업의 미래 지형도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comma@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