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 행정부 이론' 근거로 대통령에 대한 의회·법원 등 견제 무력화
"반대운동을 '테러'로 모는 현 상황, 체니가 기반 닦아줬다"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3일(현지시간) 별세한 딕 체니(84) 전 미국 부통령은 말년에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과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지만, 그가 현역 시절에 대통령에 대한 의회와 법원의 견제를 무력화하는 데에 앞장서서 결과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권력 확대 기반을 마련해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4일(현지시간)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분석기사에서 체니가 정치인·행정가로 활동하면서 대통령 권한의 확장에 앞장섰던 많은 사례들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체니의 이런 노력들이 트럼프 대통령이 공격적으로 권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반이 됐으며 그런 면에서 체니는 트럼프에 앞서 똑같은 길을 간 선구자에 해당한다고 NYT는 지적했다.
체니는 1970년대에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젊은 보좌관으로 일한 데 이어,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후 들어선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는 34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백악관 비서실장을 맡았다.
당시 미국은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표현이 생길 정도로 냉전 시대에 비대해졌던 대통령의 권력을 축소하고 제도적 견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을 계기로 들끓던 시기였다.
그러나 체니는 정치 인생 내내 이런 견제를 약화하고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행정부의 재량권을 확대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는 부통령 재직 시절인 2002년 1월 ABC 방송 인터뷰에서 대통령직과 부통령직에 대해 "우리 직책들을 우리가 담당했을 때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만들어서 후임자들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면서 "최근 30년 내지 35년간 이뤄져 온 현명하지 못한 타협 탓에 오늘날 우리는 제도 측면에서 약화됐다"고 말했다.
정권교체로 포드 행정부 백악관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체니는 1978년 와이오밍주에서 연방하원의원으로 출마해 내리 6선을 했으며 1989년에는 '아버지 부시'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맡았다.
체니는 하원의원 시절에 레이건 행정부가 이란에 무기를 비밀리에 불법 판매해 비자금을 조성해서 니카라과 게릴라들에게 지원했다는 '이란-콘트라 스캔들'의 연방의회 조사에서 공화당 하원 간사를 맡았을 때 레이건 행정부의 불법행위를 옹호했다.
당시 1987년 11월 공화·민주 양당 의원들의 합의로 채택된 보고서 본문은 헌법에 정해진 권력분립 원칙을 어긴 레이건 백악관의 불법행위를 규탄했으나, 체니는 보고서의 소수의견 부분을 대표로 집필하면서 이런 무기 지원을 불법으로 규정한 법률이 대통령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므로 위헌이라는 논리를 폈다.
체니는 부통령 재직 시절인 2005년에 '아들 부시'인 조지 워커 부시 행정부가 영장 없는 불법 도감청을 비밀리에 승인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18년 전과 똑같은 논리를 폈다.
영장 없는 도감청을 불법으로 규정한 법률 자체가 대통령의 권한을 침해한 위헌이므로 무효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체니 부통령을 비롯한 조지 워커 부시 행정부 인사들은 이른바 '단일 행정부 이론'을 근거로 내세워 대통령은 법률로 정해진 제한에 구애받지 않고 행정권을 행사할 헌법적 권한이 있다는 주장을 폈다.
입법부나 사법부가 행정부에 대한 대통령의 권한 행사에 간섭하는 법률을 만들거나 그런 판결을 내리는 것은 위헌이고 무효이므로 대통령은 그런 법률이나 판결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으로, 레이건 행정부가 이란-콘트라 스캔들 때 처음 내세웠던 이론이다.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으로 있던 1990년에 체니는 대통령에게 페르시아만 전쟁(걸프전)을 의회 승인 없이 개시하자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체니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1991년 1월 연방의회에서 선전포고 결의를 받아낸 후 전쟁을 개시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체니가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고문 등 불법행위를 정당화했고 2003년 이라크 침공과 사담 후세인 축출도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죽기 직전까지 강변했다고 지적했다.
관타나모 수감자의 변호인을 맡고 있는 알카 프라드한 펜실베이니아대 겸임교수는 가디언에" 딕 체니는 국제법과 국내법을 뒤틀어 엮어서 행정부 권한을 확대하고 관타나모 수용소를 건설하며 미국의 고문 프로그램을 정당화하는 데 썼다"고 지적했다.
그는 "당시 우리 인권 변호사들은 행정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모든 반대 운동을 '테러리즘'으로 규정하고 국가의 모든 행동을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이런 상황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며 체니가 이런 상황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limhwaso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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