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불황에 유사사태 재발우려…"기업간 통폐합 지원제도 필요"
(서울=연합뉴스) 한지은 기자 = 국내 에틸렌 생산능력 3위 기업인 여천NCC가 부도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지만, 경영 정상화까지 남은 과제는 산적해 있다.
경기 침체와 공급 과잉으로 석유화학 산업 전체가 장기 불황에 빠진 만큼, '제2의 여천NCC 사태'가 머지않았다는 우려도 나온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DL케미칼은 여천NCC에 대한 추가 자금 지원과 관련해 이날 긴급 이사회를 열고 2천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안건을 통과시켰다.
앞서 한화그룹과 DL그룹이 합작해 설립한 여천NCC는 석유화학 불황에 따른 적자와 재무구조 악화로 3천100억원의 자금 부족을 해결하지 못하면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 내몰렸다.
추가 지원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던 DL그룹이 자금 지원을 위한 유상증자를 결의하면서 여천NCC의 재무 위기는 일단 봉합 수순에 들어갔다.
다만 급한 불을 끈 것과 별개로 회생을 위한 뚜렷한 돌파구가 필요한 상태다.
여천NCC는 중국발 공급과잉 여파로 2022년 3천477억원, 2023년 2천402억원, 2024년 2천36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지난 8일부터는 여수 3공장 가동도 중단했다.
업계 관계자는 "근본적인 원인이 개선되지 않는 한 리스크는 그대로인 것으로 보인다"며 "실제로 디폴트가 현실화하면 석유화학 산업 전체에 공포감이 전염병처럼 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여천NCC 외에도 전국 3대 석유화학단지에 입주한 나프타분해시설(NCC) 설비 10곳 중 상당수는 경영난에 직면해 있다.
LG화학은 대산·여수 공장의 석유화학 원료 스티렌모노머(SM) 생산 라인 가동을 중단했으며, 나주 공장 알코올 생산도 중단했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대산 에틸렌글리콜(EG) 2공장을 비웠고, 여수산단 내 2공장의 일부 생산라인도 멈춰 세웠다. 롯데케미칼은 HD현대오일뱅크와 함께 대산석유화학단지 내 NCC 설비를 통합 운영하는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국내 석유화학 기업의 영업손익과 재무 상황을 고려했을 때 현재의 불황이 지속된다면 3년 뒤에는 기업의 50%만이 지속 가능할 것으로 관측했다.

업계에 닥친 공급과잉이 내수 성장 기반의 '버티기'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만큼 석유화학 업체 간 협업 및 재편을 통해 생존법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정부의 빠른 손질이 필요하다"며 "과도한 환경 규제를 풀고 기업 간 통폐합을 가속할 수 있는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석유화학 업계는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대표적으로 일본은 오일쇼크 여파로 산업 수익성이 악화한 1980년대 초부터 구조조정과 인수합병(M&A)을 통한 사업 재편을 단행했다.
일본 정부는 M&A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공정거래법 적용을 석유화학산업에 한시적으로 유예하는 등의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지원했다.
그 결과 1994년 미쓰비시화성과 미쓰비시유화가 합병해 미쓰비시화학이 탄생했고, 1997년 미쓰이석유화학과 미쓰이도아쓰화학이 합병해 미쓰이화학이 발족했다.
현재도 일본은 동북아 내 공급과잉에 대응하기 위해 4개 산단에서 크래커 업체 간 통합 및 설비 합리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체 생산능력의 37% 수준을 감축한다는 목표다.
공급과잉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중국도 지난해 무분별한 증설을 통한 시장 파괴를 제한하기 위해 경쟁력 열위로 판단되는 크래커 및 범용 폴리머 설비에 대해 신설을 제한했다.
정부도 조만간 석유화학 후속 지원책을 발표해 산업 경쟁력 제고에 힘을 보탤 예정이다. 지원책에는 설비 폐쇄, 사업 매각, 합작법인 설립, 설비 운영 효율화, 신사업 M&A 등 기업의 자발적 사업재편을 유인하기 위한 다양한 법제 정비와 금융·세제 방안이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인사청문회 당시 "취임하면 이른 시일 내 석유화학 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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