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히로시마서 한국인 피폭 배우는 日학생…위령비 색종이엔 '평화'
'원폭돔' 본 일본인 "핵무기 폐기 활동 확산하길"…학생들 "평화 지킬 것" 다짐
(히로시마=연합뉴스) 박상현 특파원 = 지난달 30일 오후 푸른 하늘이 펼쳐진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은 학생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히로시마역에서 노면 전차를 타고 15분 정도 이동하면 닿는 평화기념공원은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께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발한 원자폭탄의 무서움을 전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조성됐다.
공원에는 원폭으로 심하게 훼손된 건축물인 '원폭 돔'과 원폭 관련 사진·그림·물품이 전시된 평화기념자료관 등이 있어 히로시마를 방문한 여행객이라면 대부분 빼놓지 않고 들른다.
1915년 물품 진열관으로 지어졌다는 원폭 돔 앞에서는 앙상하게 남은 철골 구조물을 통해 과거에 이 건물에 반구형 지붕인 돔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원폭 돔 위령비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참배하던 60대 일본인 부부는 "또 다른 피폭 도시인 규슈 나가사키에서 왔다"며 "히로시마 원폭 돔은 처음 봤는데, 철골만 봐도 핵무기의 위력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들은 일본 원폭 피해자 단체인 '니혼히단쿄'(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가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일본에서 핵무기 폐기 활동이 더욱 확산하기를 기대한다면서 "전반적으로 평화 관련 활동이 늘어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됐을 당시 한국인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묻자 이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이 사실이)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한 것 같다"고 답했다.
평화기념공원 북서쪽에는 한국인 원폭 희생자의 혼을 위로하며 세운 위령비가 있다. 지난해 5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전 일본 총리가 한일 정상 최초로 공동 참배한 비석이다.
높이 5m인 이 비석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로시마본부 주도로 1970년 4월 세워졌다. 본래 공원 바깥에 있었으나, 재일 한국인과 일본 시민단체 요청으로 1999년 7월 공원 안쪽으로 이전했다.
작년 5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직전 평화기념공원에 들렀을 때는 이 위령비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었으나, 이날은 현장학습을 하는 학생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한국인 피폭 사실을 배웠다.
학생 10여 명을 인솔한 젊은 남성은 위령비 앞에서 "한반도 출신 노동자가 일본에 왔고 그중 피폭돼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며 "비석 받침의 거북은 한반도 쪽을 보고 있다고 한다"고 말했다.
다른 인솔자들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 한국인이 있었고, 사망자 중에 한국인도 많았다고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거북 받침 위에는 색색의 종이로 접은 학과 거북 장식이 놓여 있었다. 줄줄이 엮은 종이 거북에는 한글로 '평화'라고 적혀 있었다.
종이학으로 만든 또 다른 원형 장식물 가운데에는 "히로시마에서 평화에 대해 배웠습니다. 우리도 비복자(피폭자) 분들 목(몫)까지 열심히 살겠습니다. 명복을 빕니다"라고 또박또박 적은 글이 있었다.
한국인 위령비 근처 '원폭 공양탑' 앞에 학생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 다가가니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를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이들은 원폭 사망자 유골을 모신 공양탑을 보고 우렁찬 목소리로 "지금부터 평화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 가겠다. 전쟁이 없는 세계를 위해 우리가 평화를 계속해서 지킬 것을 맹세한다"고 외쳤다.
평화의 중요성은 발을 딛기 힘들 정도로 관람객이 많았던 평화기념자료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끔찍한 상처를 입은 원폭 피해자를 촬영한 사진을 보며 연신 "무섭다"는 말을 내뱉었고, 누더기가 된 피폭자들의 옷가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 학생은 "그 한순간이 가져온 슬픔과 괴로움, 불안과 절망. 평온한 하루하루에, 행복한 한때에 그것들은 갑자기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문구를 유심히 지켜봤다.
자료관 1층에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이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려주는 시계가 있었다.
지난달 30일 기준으로 2만8천940일이 표시돼 있었다. 이 숫자가 늘어나는 동안 또 다른 핵무기가 세계 어디에서도 사용되지 않기를 바라며 자료관을 나섰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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