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인권개선 요구를 체제 사수의 대결로 여겨"
이일규 전 쿠바주재 北참사 국제행사서 문건 공개
"인권 대결전은 제1선 전투장…유엔서 무투표, 서방 인권 문제 부각"
(제네바=연합뉴스) 안희 특파원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권개선 요구를 체제 사수를 위한 '대결'로 여기고 외무성을 통해 구체적인 대응 지침을 재외공관에 하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방침은 지난해 11월 탈북해 한국에 온 이일규 전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가 공개한 문건에서 드러났다.
북한의 인권 참상을 증언해온 탈북자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인권 압박을 받는 개발도상국들을 자극해 연대하라는 내용 등이 문건에 담겼다.
이 전 참사는 28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의 한 호텔에서 통일부와 비정부기구(NGO) 휴먼아시아가 연 '2024 북한 인권 국제대화' 행사에서 자신이 입수한 북한 외무성 전문 12건을 공개하며 이를 북한 인권 문제 해결에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이 문건들은 미국 뉴욕과 스위스 제네바 등 유엔을 담당하는 재외공관에 2016년 1월부터 작년 9월까지 북한 외무성이 보낸 것이다.
문건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서방 중심으로 제기되는 북한 인권 개선 요구에 큰 관심을 두고 직접 외교지침을 내렸다.
김 위원장이 외무성을 통해 내린 지침을 뜻하는 '포치' 문건 가운데 2017년 1월 11일자를 보면 "인권 대결전이 당과 사상, 제도를 사수하기 위한 대적 투쟁의 제1선 전투장"이라고 나온다. 북한 인권을 둘러싼 국제사회의 개선 압박을 최우선적인 대결 국면으로 인식하는 셈이다.
북한 인권 현실을 증언하는 탈북자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극도의 경계감을 드러낸다.
포치 문건에는 "탈북자들을 사회정치적으로 매장하기 위한 여론 작전을 강하게 실시하고 인권기구 등도 탈북자 증언을 활용할 경우 북한과 절대 대화할 수 없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라"라고 기재됐다.
서방의 인권 문제를 부각하라는 지시도 있다.
2016년 1월 15일 문건을 통해 북한 외무성은 외교관들에게 '일본군 성노예 문제', '유럽의 난민문제' 등을 공론화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유엔이 매년 채택해오는 북한인권 결의안을 유엔 회의장에서 굳이 표결로 가져가지 말라는 지침도 나온다. 표결해도 어차피 채택될 바에야 소위 '무투표 채택'이 김정은 정권의 존엄을 지키고 우방국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2016년 11월 2일자 문건은 당시 71차 유엔총회 3위원회 회의에서 북한 인권결의안이 채택될 때 "결의를 전면 배격하는 입장을 발표한 뒤 퇴장할 것"이라는 지시 사항을 담고 있다.
인권 개선 압박을 받는 다른 개도국과의 협력을 모색하라는 주문도 있다.
2019년 2월 22일자 문건은 2019년 유엔 정례인권검토(UPR)를 앞둔 북한 외교관들에게 "중국, 쿠바, 시리아,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등이 지난 UPR 때 우호적 발언을 해줬음을 감안해 유사한 지지 발언을 해 줄 것을 요청하고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2020년 2월 11일 문건에도 일부 국가의 인권 상황을 특정해 문제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이들 국가가 모두 개도국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개도국들이 연대해 이런 제도를 근절시켜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 전 참사는 이날 행사에서 "북한은 외교관들의 탈북을 부담스러워 한다"며 "정권의 취약성과 인권 상황을 가리기 위해 짜 놓은 얼마 되지 않은 전략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prayer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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