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우리 가락에, 포도향에 두 번 취하다…충북 영동행 국악와인열차
객실칸서 와인 즐기며 국악·판소리 공연 감상…연간 4만여명 이용
영동 와이너리·관광지 투어 포함…"관광 활성화로 인구위기 극복"
(영동=연합뉴스) 임성호 기자 =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어떤 달이든 좋아 열두 달이 다 좋아."
지난 24일 오전 서울역발 충북 영동역행 열차 내에서 흥겨운 국악가요 '열두달이 다 좋아' 가락이 울려 퍼졌다. 꽃무늬 한복 차림의 국악인 박혜정 씨가 이벤트 칸 중간에 마련된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구성진 민요와 국악가요 가락을 선보였다.
모든 좌석이 2명, 4명씩 마주 보고 앉게 된 자리 사이 테이블에는 국내 3대 포도 산지로 꼽히는 영동의 샤인머스캣으로 빚은 화이트와인과 안줏거리가 차려졌다. 박씨는 국악식 건배사 "얼씨구절씨구"로 건배를 제안했고, 와인잔을 든 승객들은 "지화자 좋다"로 화답했다.
곧이어 소리꾼 최한이 씨의 판소리 공연이 펼쳐졌다. 또 사회자의 재치 있는 영동군 소개와 단체 가위바위보 게임 등 레크리에이션에 달콤한 와인을 곁들인 두 시간여의 기차 이동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실내 정숙'이 미덕인 일반 여객열차와 달리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이 열차는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의 12가지 관광전용열차 중 하나인 '충북영동국악와인열차'다.
영동군이 2005년 국내 유일의 포도·와인산업 특구로 지정된 이후 2006년 12월 서울∼영동 구간에서 운행이 시작됐다. 2009년 '와인인삼열차', 2011년 '와인시네마열차'를 거쳐 2018년 2월 와인에 국악을 접목한 현재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왕산악, 우륵과 함께 한국의 3대 악성으로 추앙받는 난계 박연(1378∼1458)의 탄생지가 영동군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코로나19 기간인 2020년 초부터 약 2년간 운행을 중단했다가 2022년 5월 다시 달렸다. 총 7량(객실 6량)으로 주 2∼3회 운행하는 이 열차에는 2022년 2만4천536명, 지난해 4만1천288명이 탑승하는 등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올해 1∼8월에는 3만1천636명이 이용했다.
이날 국토교통부 기자단이 탑승한 열차도 정원 245명을 모두 채웠다고 코레일 관계자는 전했다.
공연이 펼쳐지는 이벤트 칸의 예약이 대개 먼저 마무리되지만, 동승자들과 조용히 와인을 즐길 수 있는 일반 칸도 꾸준히 손님이 몰린다고 한다.
현재는 당일치기인 서울∼영동 코스 외에도 계절별로 남원, 순천, 동해 등 다른 지역에도 열차를 투입하는 1박 2일 패키지를 운영하고 있다.
국악와인열차 운영사인 코레일 협력여행사 '행복을주는사람들' 원종혁 이사는 "요즘은 한 달에 10∼12번 운행하는데, 그중 4번 정도는 영동행"이라며 "이날이 2018년 2월 이후 통틀어 395번째 운행"이라고 설명했다.
이 열차는 정부와 코레일 등이 지난달 영동군 등 전국 23곳 인구감소지역의 생활인구 활성화를 위해 선보인 '다시 잇는 대한민국, 지역사랑 철도여행' 관광 상품에 포함됐다. 이를 통해 패키지 요금 중 철도 운임 반값 할인을 받아 총 비용의 약 10%인 1만5천원을 절약할 수 있어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고 코레일 관계자는 전했다.
오전 11시 30분께 영동역에 내리니 마침 점심시간. 와인열차 탑승객들을 나눠 태운 버스는 약 10분을 달려 식사 장소인 '와인코리아' 와이너리에 도착했다. 1996년 국내 최초의 기업형 와이너리로 설립된 이곳은 2006∼2016년 코레일과 함께 와인열차를 운영하기도 했다.
양조 시설을 둘러보고 옮겨간 지하 식당에는 오리 로스구이와 함께 영동 마니산에서 이름을 딴 '샤토 마니' 와인이 2명당 1병씩 준비돼 있었다. 원종혁 이사는 "아침부터 와인으로 시작해 식사마다 곁들일 수 있어 딱 세 번만 취했다가 깨면 집에 돌아가는 셈"이라고 말했다.
국악와인열차 이용객은 영동군과 인접한 경북 김천시 직지사 등을 방문하고 대전역으로 이동, 당일 저녁 서울역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귀경 열차에서도 국악 등 공연이 진행된다.
영동군 인구는 1965년 12만4천여명으로 최고점을 찍은 이후 1990년 7만6천여명, 2010년 5만600명 등으로 꾸준히 감소해 왔다. 2019년 5만명 선이 깨진 뒤에도 내림세가 이어져 지난달 4만3천여명까지 줄었다.
반면 영동군의 와이너리와 카페 등의 이용 요금을 할인받을 수 있는 디지털 관광주민증을 보유한 '명예 주민'은 지난 6월 발급 시작 이후 약 3달 만에 5만명을 넘었다. 영동군이 저출생 대응과 더불어 관광객 유치를 통한 지역경제 살리기에 역점을 둔 데 따른 것이다.
김영환 영동군 관광과 주무관은 "국악와인열차와 연계한 관광 활성화를 통해 인구 위기 극복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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