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경제위기 아르헨, 무료급식소에 연금생활자·젊은이도 몰린다
연간 260% 살인적 물가급등에 '아르헨 강남역·명동'에도 무료급식소
"연금 받고 여러가지 잡일 해도 먹고살기 힘들어 일주일 3번 무료급식"
인구 10배 먹여 살릴 식량생산국에서 450만명 매일 한 끼 이상 굶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연합뉴스) 김선정 통신원 = "작년까지는 은퇴연금으로 생계를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으나, 정권이 바뀐 후는 급격한 물가 급등으로 2주 전부터 무료 급식 장소를 찾아다닌다"
다른 무료 급식자들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서 식사하던 말끔한 복장의 70대 노인은 사진 촬영은 하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내가 무료 급식을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며 부끄러워했다.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산층 거주지역인 카바지토(CABALLITO).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소매 상가 월세가 제일 높은 곳이 바로 이 지역의 리바다비아 대로와 아코이테 대로의 교차 지점으로, 구매력을 가진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일요일인 25일(현지시간) 남극한파로 늦추위가 한창인 이곳에 도착하니 아직 오전 11시도 안 되었는데 3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무료 급식을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강남역 옆이나 명동 한복판에서 무료 급식을 하는 셈이다.
담당자인 레오나르도(46세) 씨는 무료 급식은 12시 반부터 시작하고 금방 끝나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서 오라고 당부했다.
그는 "이곳에서 무료 급식을 시작한 지는 1년이 넘었다"며 "우리는 다 이 동네 이웃들이고 작년에 10명이 자원봉사로 시작해서 일요일마다 70명에게 무료 급식을 시작했는데 이제 자원봉사자들은 25명에 이르고 한 번에 200여명분을 준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우리가 이곳을 선정한 이유는 이 지역처럼 잘 사는 지역에도 우리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면서 "우리는 100% 이웃들의 도움으로 운영이 되며, 경제위기가 깊어져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자원봉사자 중 한 명인 파트리시아(60, 심리상담가)는 "이들의 대부분이 노숙자이며, 일부는 오래전부터 노숙 생활을 한 구조적 빈곤층이다. 하지만 요새는 은퇴자 어르신과 젊은이들이 늘었다"면서 "이들은 중산층이었지만, 높은 물가와 불경기로 빈곤층으로 전락한 경우다"라며 씁쓸해했다.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옷차림이나 짐을 봐서는 80% 정도는 거리 생활을 하는 노숙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파트리시아의 설명처럼 생활비가 부족한 젊은이들과 노인들로 보였다.
다른 자원봉사자인 카타리나(23, 대학생)는 "어떤 상황에 부닥친 것인지 직접 물어보지는 않지만, 꾸준히 살펴보면서 그들과의 교류를 이어 나가고 있다"며 "저 젊은 동양 여자분은 매주 꾸준히 오지만 매우 수줍어서 음식을 받자마자 숨어서 식사하고 간다"고 전하기도 했다.
20대로 보이는 동양 여자는 중국인이었다. 그녀는 연합뉴스에 1년 전부터 일하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시내에서 방을 얻어 4명이 같이 사는데 여러 무료 급식소를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와 사진 촬영에 흔쾌히 응한 카를로스(74)는 "난 은퇴자로 최저 연금(한화 25만원 정도)을 받는데 이 걸로 월세, 공과금, 식비를 해결할 수가 없어서 여전히 각종 잡일을 하고 있고, 또 아이들과 손주들에게 경제적 도움도 줘야 한다"면서 "연금을 받고 페인트, 지붕 수리, 배수관 수리 등 되는 일은 다 해도 물가가 너무 올라 먹고 살기 힘들어서 일주일에 3번은 무료 급식소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는 세계 3대 곡창지대인 팜파스를 갖고 있다.
최근 유니세프는 국민의 10배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는 아르헨티나에서 밤마다 100만명의 어린이가 저녁을 먹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며, 450만명의 성인이 경제적 이유로 하루 한 끼는 건너뛰고 있다고 발표했다.
지난 2일 아르헨티나 국립통계청(INDEC)은 올해 1분기에 국민의 54.8%인 2천55만명이 가난하며, 어린이 빈곤율이 69.7%로 급증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7월 아르헨티나의 월간 물가상승률은 4%대로 둔화했다. 그러나 그동안 누적된 물가급등으로 인해 연간 물가상승률은 264%를 기록해 한국의 100배를 넘었다.
지난 12월에 취임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급진적인 재정 개혁을 단행했고 중앙부처 축소, 공공사업 중단, 지방자치제 자금 이전 중단 등을 통해 마침내 16년 만의 재정 흑자를 이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물가 인상보다 낮은 은퇴자 연금 인상, 무료 급식소 식량 지원 중단 등의 과격한 조치도 포함돼 있어 국민들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커졌다.
또 급진적 긴축 개혁은 심한 스테그플레이션을 일으키면서 소비(-16.1%), 산업생산(-20.1%) 그리고 설비투자 (-23.4%) 하락까지 '트리플 감소'를 기록하고 있어, 에너지, 농업, 광업 및 수산 부문을 제외하고는 모든 생산 분야가 추락하고 있다.
전기요금 10배, 가스요금 6배, 수도요금 5배 등 공과금은 급등했는데, 급여 구매력은 아직 회복되지 않아 대부분의 국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이러한 혹독한 개혁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밀레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평균 50% 이상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 회사 모닝 컨설트는 지난 6일 밀레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60%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계 수입으로 생계유지가 되지 않아 저축을 풀어서 생활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밀레이 대통령의 개혁을 지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치전문가들은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제1야당인 페론당의 리더 부재를 꼽고 있다. 또한 제2야당 연합이 친여당 성향을 보여, 제대로 된 야권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즉, 국민들은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 컨설팅사 폴리아르키아의 알레한드로 카테르버르그 분석가는 현지 일간 라나시온과의 인터뷰에서 "야권 리더의 부재로 현재 이 기조가 이어진다면 2025년 총선에서도 밀레이의 여당이 50% 이상의 의석을 확보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부 분석가들은 연말까지 뚜렷한 경제회복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경기 침체로 인한 지지자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를 것이며, 이는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져 국정운영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내다봤다.
sunniek8@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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