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테트리스] "아기 백신 없어요"…제재에 애타는 러 부모들
MMR 등 수입 '필수' 백신 품귀…"내년에 풀릴지도 불확실"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인영 특파원 = "어쩌지…"
이달 초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첫돌을 맞은 한국인 아기 시안이 부모의 걱정이 커졌다.
지난 달 말부터 모스크바에 있는 병원 20여곳에 전화해봤지만, 공공의료기관과 민간병원을 불문하고 MMR 백신이 있다는 곳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수예방접종 대상 중 하나인 MMR은 홍역·유행성이하선염(볼거리)·풍진을 예방하는 종합 백신으로 생후 12∼15개월과 만 4∼6세 등 두 차례에 걸쳐 접종해야 한다.
모스크바의 한 병원 관계자는 전화 통화에서 "현재 MMR은 모스크바뿐 아니라 러시아 다른 지역에서도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는 "미국산 MMR 백신을 대체하는 러시아산 3가 백신 '박트리비르'도 있지만, 지금은 우리에겐 러시아산 백신도 없다"고 덧붙였다.
병원에 따라 홍역, 풍진을 각기 예방하는 러시아가 개발한 백신은 맞을 수 있다고 설명하는 곳도 있었다.
수두 백신을 보유한 병원도 드물다. 수두 백신도 생후 12개월에 맞아야 하는 필수접종 백신이다.
조바심이 난 시안이 부모는 6번쯤 전화를 돌리다가 1시간 거리에 있는 한 병원에서 수두 백신 '바릴릭스'가 있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접종을 예약했다.
지난 2일 시안이에게 수두와 독감 백신을 접종한 이 병원 의사는 백신 품귀 현상에 대해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지금 상황' 때문에 백신 물류에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에서 '특별군사작전'을 벌인 이후로 서방이 제재를 가한 영향으로 백신 수급에 문제가 생겼다는 설명이다.
미국 제약사 MDS는 지난해 7월 러시아에 MMR과 수두 백신 '바리박스'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었는데 그 여파가 1년 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셈이다.
이 의사는 내년에는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대한다면서도 수입 MMR 백신이 아닌 러시아산 대체 백신 물량 공급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했다.
접종 상담을 위해 방문한 모스크바의 다른 어린이 병원 의사는 "러시아 아기 엄마들도 여러 병원에 전화를 돌려서 백신을 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의사는 디프테리아 등 5가지 질병을 예방하는 종합백신 '펜탁심'과 폐구균단백결합백신 '프리베나'는 현재 병원에 재고가 있지만, 시안이에게는 현지 접종 계획에 따라 내년에 접종할 것을 권했다.
펜탁심, 프리베나도 MMR, 바릴릭스처럼 서방의 다국적 제약회사가 제조하는 백신이다.
러시아 언론들도 아기를 위한 백신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현지 일간 코메르산트는 지난달 "최소 모스크바의 민간 진료소에서 홍역 백신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며 여러 병원을 조사한 결과 MMR 백신이 있는 곳은 없었고 러시아산 박트리비르도 물량이 넉넉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코메르산트는 이미 지난 10월 MMR 백신이 부족하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당시 모스크바 보건당국은 11월 말에는 부족한 품목이 공급될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또 업계 전문가의 말을 빌려 "MMR 백신은 지난 봄 이후 들어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모스크바뿐 아니라 코스트로마, 자바이칼 등 러시아의 다른 도시에서도 홍역, 수두 백신이 부족하다는 보도가 해당 지역 매체를 통해 나왔다.
페도트 투무소프 하원(국가두마) 의원은 현지 매체 '뉴스.루'에 백신 부족 원인을 "물류상의 어려움"이라고 설명했다.
백신 부족과 맞물려 러시아에서 어린이 감염병 발생이 증가한 것으로 걱정을 더욱 키웠다.
뉴스.루는 지난달 16일 의료기관전문포털 메드베스토니크를 인용, 올해 1∼9월 보고된 홍역 발생 사례가 8천73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288배에 달하며 대부분의 사례는 14세 미만 어린이에게서 나타났다고 전했다.
그러나 러시아 보건·위생·검역 당국인 로스포트레브나드조르는 최근 4개월간은 발병률이 감소 추세에 있다면서 홍역이 통제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시안이 부모는 일단 내년 초까지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릴 예정이다. 한국에 가면 접종할 수 있지만 대러시아 제재로 직항이 없어진 터라 이제 막 돌쟁이를 데리고 장거리 경유편을 탈 엄두가 안 난다.
러시아산 백신을 맞는 방법도 있지만 아기가 한국에 돌아가 4∼6세가 됐을 때 같은 백신을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 걸린다.
한 병원 상담원은 "아르메니아 등 다른 나라에서 맞는 방법도 있다"고 권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에도 경제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자신하지만 당장 신생아에게 맞힐 예방 접종을 찾아 병원을 헤매야 하는 부모의 마음을 달래기엔 너무 먼 얘기다.
abbi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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