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경찰 한인 살해' 판결 의혹만 남아…유족 배상도 어려워(종합)
'용의선상' 고위직들 기소 안돼…피의자들 '보복 살해 위협' 호소
몸값 뜯어내는데 한인도 연루…범행 동기도 제대로 규명 안돼
(하노이=연합뉴스) 김범수 특파원 = 필리핀 앙헬레스에서 7년 전 현지 경찰이 자행한 고(故) 지익주씨 납치·살해 사건 1심 판결 후에도 '꼬리 자르기' 등 각종 의혹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현지 경관이 무고한 한인을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점에서 많은 현지인을 경악하게 했다.
핵심 피의자들은 수사 과정에서 '살해 위협'을 호소했고, 용의선상에 최고위직 인사까지 포함되면서 경찰 내부에 거대한 커넥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또 전직 경찰 등 2명에 대해 무기징역이 선고됐지만 피해 유족에 대한 국가 배상은 어려울 전망이다.
이런 가운데 지씨 부인 최경진씨는 박진 외교부 장관에게 실체 규명 및 배상 지원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내 한국 정부 대응에 관심이 쏠린다.
◇ 사건 경위·잔혹한 범행 수법에 '경악'
지익주씨는 2016년 10월 18일 앙헬레스 자택에서 필리핀 경찰들에게 납치돼 살해됐다.
이 사건은 당시 한인사회뿐 아니라 많은 필리핀인을 충격에 빠뜨렸다.
현직 경찰이 무고한 한인을 납치한 뒤 살해했을 뿐 아니라 수사 과정에서 잔인하고 치밀한 범행 수법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망 당시 53세였던 지씨는 한진중공업 임원을 지냈으며, 필리핀에 부임한 뒤 수빅 조선소 건설에 참여했다.
그는 퇴직 후 개인 사업을 하다가 살해됐다.
경찰청 마약단속국(PNP AIDG) 소속 경찰관인 산타 이사벨과 국가수사청(NBI) 정보원인 제리 옴랑은 사건 당일 오후 앙헬레스 소재 자택에서 지씨를 납치했다.
범인들은 지씨를 본인의 차량에 강제로 태운 뒤 경찰청 마약단속국 주차장으로 데리고 가서 교살했다.
사체 처리 과정에서도 이들은 천인공노할 잔학성을 보였다.
다음 날 오전 자신들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인근 칼로오칸시의 화장장에서 '호세 루아마르 살바도르' 명의로 된 위조 사망증명서를 제출한 뒤 지씨의 시신을 소각했다.
이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유해를 화장실 변기에 버리는 등 반인륜적인 범죄를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 수도 국가수사청장 등 14명 용의선상…5명만 최종 기소
수사를 맡은 경찰청 납치수사국(PNP AKG)은 최고위 경찰 간부 등 14명을 용의선상에 올려 기소 의견으로 송치했지만, 검찰은 5명만 최종 기소했다.
당시 용의자 명단에는 사건 당시 경찰청 마약단속국 팀장인 라파엘 둠라오와 팀원인 산타 이사벨, 로이 빌레가스가 포함됐다.
특히 경찰청과 경쟁 기관인 국가수사청의 경우 리카르도 디아즈 수도청장과 호세 얍 부청장 등 최고위직과 로엘 볼리바르 마약수사팀장, 정보원인 제리 옴랑이 용의자로 지목됐다.
이밖에 화장장 소유주인 헤라르도 산티아고와 직원 5명을 비롯해 납치 차량 소유주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검찰은 이 중에서 경찰청 소속인 둠라오와 이사벨, 빌레가스를 비롯해 국가수사청 정보원 옴랑과 산티아고 등 5명만 인질강도·살인·차량 절도 등의 혐의로 최종 기소했다.
이후 약 5년 8개월간 84차례에 걸쳐 심리가 진행된 가운데 빌레가스는 국가 증인으로 채택돼 2019년 1월에 석방됐다.
산티아고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 사망했다.
결국 앙헬레스 법원은 올해 6월 6일 열린 1심 판결에서 이사벨과 옴랑에게 각각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하지만 검찰이 주모자로 지목한 이사벨의 상관 둠라오에 대해서는 법원이 무죄를 선고, 현지 언론에서도 판결 및 사건 실체 규명에 문제를 제기했다.
◇ 피해자 살해된 뒤 유족 몸값 1억2천만원 뜯겨…한인도 연루
사건 발생 12일 뒤에 신원불상자가 지씨가 피살된 사실을 모르는 유족을 상대로 몸값을 요구했다.
그는 납치범들이 가족의 신상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면서 경찰에 신고하면 다시는 남편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부인 최씨를 협박했다.
이어 유족에게 몸값이 든 가방을 차량에 싣고 여러 장소로 계속 이동하게 하면서 500만페소(약 1억2천만원)가 든 돈 가방을 가져갔다.
또 300만 페소를 추가로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당하자 연락을 끊었고 결국 최씨는 남편이 사라진 지 보름 만에 경찰청 납치수사국에 신고했다.
이 과정에서 한인 A씨가 몸값 전달을 도운 것으로 드러나 공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A씨는 한국에서 수배 중인 사실이 확인돼 필리핀 이민청에 검거돼 조사받았으나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풀려난 뒤 본국으로 추방됐다.
◇ 용의자들 '보복 살해' 위협 호소…범행 동기 정확하게 규명 안돼
지씨 부인은 현지 유명 언론인 '인콰이어러'와의 인터뷰에서 남편의 생사를 알 수 없다면서 당국에 신속한 수사를 요청했다.
이로 인해 사건이 공론화되자 당시 경찰청장인 로널드 델라 로사는 범인이 자수하지 않으면 사살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2017년 1월 16일에 빌레가스가 가장 먼저 경찰청 납치수사국에 자수했다.
하지만 함께 용의선상에 오른 이사벨과 옴랑, 산티아고는 경찰에 자수하면 보복 살해될 우려가 있다면서 신변보호를 요청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범행 동기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청은 지씨가 경찰에 상납을 거부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직접적인 물적 증거나 진술은 확보하지 못했다.
1심 판결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된 이사벨과 옴랑은 "우리가 지씨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사법당국의 수사 방향이 엇갈리면서 진통을 겪기도 했다.
경찰청은 사건에 연루된 국가수사청 고위직의 지시를 받아 이사벨이 납치·살인을 자행했다고 판단했다.
반면 국가수사청은 이사벨이 경찰청 조직 상관인 둠라오의 지시에 따라 범행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양측이 각기 다른 수사 결과를 내놓으면서 검찰은 상당 기간 기소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로드리고 두테르테 당시 대통령은 유족의 요청에 따라 경찰청을 주 수사기관으로 지정했다.
◇ 검찰 항소에도 판결 뒤집기 어려워
현지 검찰은 지난 9월 4일 둠라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제기했다.
또 유죄가 선고된 이사벨과 옴랑도 1심 판결에 불복해 역시 항소를 제기한 상태다.
이런 가운데 1심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필리핀 사법체계에서는 1심에서 피고에게 무죄가 선고되면 사실상 판결이 확정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판사의 중대한 재량위반(Abuse of discretion)이 있을 경우에만 항소 제기가 인정되는데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
또 항소 절차를 검찰이 아닌 항소청(Solicitor General)에서 새로 떠맡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여러 제약이 있다.
◇ 피해 유족 배상 가능성 작아…한인 보호 대책 마련 시급
피해 유족이 국가로부터 배상받을 가능성도 현재로서는 매우 낮다.
필리핀 헌법 제16조 3항에 명시된 국가 면책 조항은 "국가가 동의하지 않는 한 정부 또는 대통령을 피고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경찰청장 등 고위직 개인에 대한 소송은 제기할 수 있으나, 이 경우도 납치살인 행위에 대한 불법적인 고의성이나 권한 남용이 입증돼야 한다.
경찰청은 이번 사건이 하급 직원의 개인 일탈 범죄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유족이 배상받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다만 형사 사건의 경우 판결을 근거로 피해 금액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며, 별도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1심 판결에서 유죄가 선고된 수감자들이 거부할 경우 피해 보상을 강제할 방법이 없다.
이런 가운데 본국 정부가 필리핀에서 자주 발생하는 한인 대상 강력 범죄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교민사회에서 나온다.
2012년 이후로 필리핀에서 발생한 한인 살해 사건은 총 57건에 사망자는 63명에 달한다.
그러나 정식 재판을 통해 실형이 선고된 것은 지씨 피살 사건이 처음이다.
한편 지씨의 부인 최경진씨는 박진 외교부 장관 앞으로 이번 사건의 실체 규명 및 피해 배상을 도와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했다.
이와 관련, 외교부 당국자는 "현재 필리핀 사법부에서 관련 항소 절차가 진행 중인 사안"이라면서 "유족 측 입장에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영사조력을 제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심재신 필리핀한인총연합회장은 "국가의 도움이 절실한 시기에 외교부장관에게 보낸 서한이 본국 정부가 사건의 엄중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bum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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