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청소 피해 아르메니아계 이틀째 대탈출…국제사회 중재 분주
'옛소련 화약고' 아제르바이잔 영토분쟁 재점화…폭발사고로 200여명 중상
튀르키예·아제르 정상회담…"아르메니아계 주민 권리 보장"
(제네바·서울=연합뉴스) 안희 특파원 박진형 기자 = 아제르바이잔이 영토 분쟁 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 일대를 장악하자 '인종 청소' 공포에 휩싸인 현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탈출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 중 수백 명이 대규모 폭발 사고로 다치면서 혼란이 한층 가중되고 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은 최대 우방인 튀르키예와 정상회담을 하며 이 지역을 완전히 자국 영토로 복속하는 '굳히기'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 "탈출 난민 6천650여명 넘어…주유소 폭발로 200여명 중상"
25일(현지시간) AP·로이터·AFP 통신 등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정부는 이날 저녁 현재 나고르노-카라바흐 주민 최소한 6천650여명이 아르메니아로 들어왔다고 밝혔다.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빠져나와 아르메니아에 입국한 주민들의 규모는 이날 오전 1시 1천850명에서 오전 8시 4천850명으로 급증했고, 이후에도 증가세를 이어갔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중심 도시 스테파나케르트에서는 많은 주민이 소지품만 챙긴 채 트럭과 버스 등에 간신히 몸을 싣고 빠져나오느라 거리가 혼란에 휩싸였다.
또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르메니아로 향하는 도로마다 탈출하는 난민들을 태운 차량 행렬이 몰려 매우 혼잡하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국경 인근 아르메니아 도시 고리스에서는 당국이 시내 중심가의 영화관에 난민 지원 센터를 설치, 밀려드는 난민들을 맞이하며 숙소 등 등록을 접수했다.
아르메니아에 도착한 난민들은 자신들이 평생을 살아온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 지역의 역사가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체념하는 분위기였다.
고리스에 온 한 난민은 로이터에 "아무도 돌아가지 않고 있다"며 "내 생각에 (나고르노-)카라바흐 얘기는 이제 영원히 끝났다"고 밝혔다.
손주들과 함께 탈출했다는 54세 여성은 아제르바이잔군의 총격으로 친척이 숨지고 여럿이 다쳤다며 "갈 곳이 없다"고 한탄했다.
세 자녀를 데리고 아르메니아로 탈출한 한 어머니는 어린 딸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모든 것을 거기 두고 왔다"
이런 가운데 스테파나케르트 외곽의 한 주유소에서는 탈출하는 주민들을 태운 차들이 몰린 가운데 연료 탱크가 폭발해 200명 이상이 부상했다.
타스 통신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자치지역의 게감 스테파냔 옴부즈맨은 "휘발유 탱크 폭발로 인한 부상자가 200명을 넘었다"면서 "그들 중 대부분이 위중하거나 사경을 헤매는 상태"라고 전했다.
그는 "지역의 의료 시설로는 이들을 전부 구할 수 없다. 환자 이송을 위한 항공편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고 원인은 아직 불명확하지만, 자치지역 당국에 따르면 탈출하려는 주민들이 주유소에 기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주유하러 줄줄이 차를 대고 기다리던 도중에 폭발이 일어나 피해가 큰 것으로 보인다.
AFP에 따르면 한 관리도 구체적인 수치는 밝히지 않은 채 사망자들이 있음을 시사했다.
◇ 바이든, 아르메니아에 친서…아제르바이잔은 튀르키예와 정상회담
이처럼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과 난민들을 둘러싼 인도주의적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서맨사 파워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처장은 이날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를 만나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친서에서 아르메니아가 인도주의적 지원 필요성에 대응할 수 있도록 미국이 돕겠다고 약속했다.
또 파워 처장은 "아르메니아의 주권·독립·영토 보전·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확인하기 위해" 방문했다며 아르메니아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에 파시냔 총리는 파워 처장에게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인종 청소 과정이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다. 이는 매우 비극적인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이날 우방인 튀르키예와 정상회담을 열고 분쟁 지역을 아제르바이잔의 통제하에 재통합하는 데 뜻을 같이하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자국 영토로 다지는 작업을 진행했다.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은 이날 오후 아제르바이잔 나히체반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 만났다.
두 정상은 회담 후 공동 회견에서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인도적 지원물품을 보내기 시작했고, 이는 인종과 관계 없이 이 지역 주민들이 아제르바이잔 시민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나고르노-카라바흐 주민들의 권리는 아제르바이잔에 의해 보장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알리예프 대통령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아제르바이잔 사회에 재통합하는 과정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내 분쟁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지난 19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일대에서 아르메니아계 자치세력 군대와 무력 충돌이 빚어진 후 신속하게 이 지역을 사실상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계 주민 최소 200명과 아제르바이잔군 수십 명, 러시아 평화유지군 병력 5명이 숨졌다고 영국 BBC 방송이 전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은 국제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로 인정되지만, 12만명에 이르는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아르메니아계 자치세력은 군대를 운영하며 아제르바이잔과 분쟁을 거듭해왔다.
아제르바이잔은 이날 아르메니아계 자치세력과 나고르노-카라바흐 북쪽 코잘리 마을에서 두 번째 회담을 열었다.
아르메니아계 자치세력의 군대를 무장해제하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아제르바이잔의 제안을 놓고 양측은 협상을 벌였지만, 최종 합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실은 성명을 통해 "오늘 회담은 건설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며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대한 인도적 지원 방안, 의료서비스 제공 방안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고 전했다.
이런 가운데 아제르바이잔 국민들은 이번에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는 승리를 거뒀다며 자축하는 분위기라고 AFP는 전했다.
아제르바이잔 제2의 도시인 간자에서 한 44세 주민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을 향해 "그들이 모두 카라바흐에서 떠나면 좋겠다. 그들이 남아서 아제르바이잔 국적을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며 "그렇지 않으면 다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jh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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