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안된 민간 아파트 무량판 조사…정부·건설업계 '대혼란'
무량판 기둥에 전단보강근 없어도 조사 대상…공공과 조사 대상 중복도
293곳에서 조사 대상 60여곳 추가…조사 방식도 사전 검토 없이 서둘러 발표
업계 "졸속·중복 조사 우려"…"정부가 무량판 장려하고 위험 공법 취급" 불만도
(서울=연합뉴스) 서미숙 기자 = 정부가 LH뿐만 아니라 무량판 구조를 적용한 민간 아파트 293곳에 대해서도 안전점검을 실시하기로 한 가운데 세부 시행방안을 놓고 혼선이 일고 있다.
지하 주차장만 문제가 된 LH와 달리 민간 아파트는 현재 입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주거동까지 조사키로 하면서, 구체적인 조사 대상과 조사 방식 등을 놓고 업계와 정부가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
당초 188개라고 공개한 무량판 구조 민간아파트 입주 단지도 60여곳이 추가된 것으로 전해졌다.
주택업계는 "정부가 리모델링이 쉬운 '장수명 주택' 건설을 위해 무량판 공법을 권장해놓고 LH 아파트의 부실시공의 책임을 민간에까지 지우려고 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 업계 "판상형 주거동 조사방식 바꿔달라"…국토부 '난색'
4일 주택건설업계는 이날 무량판 아파트의 현장 조사 방식에 대해 "무량판 혼합 구조라도 전단보강근이 들어가지 않은 주거동까지 입주민이 거주하는 세대 안으로 들어가 현장 조사를 하는 것은 과도하다"며 국토교통부에 조사 방식을 바꿔줄 것을 건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아파트 주거동에 적용한 무량판 구조는 벽식 공법(세대와 세대 간)과 무량판 공법(세대 내부)이 혼재된 복합 구조다.
그러나 무량판인 세대 내부에서도 방과 방 사이가 벽으로 구획돼 있어 기둥이 들어간 곳이 많지 않고, 기둥이 있더라도 전단보강근을 쓰지 않은 곳이 많다는 게 건설업계의 주장이다.
무량판 복합 구조에서 슬래브(상판) 두께와 콘크리트 강도에 대한 구조계산을 진행해 하중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슬래브와 기둥 접합부에 전단보강근을 쓰고, 필요 없으면 보강근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형 건설사의 한 관계자는 "판상형 아파트는 외벽, 세대 간 벽, 내부 벽, 엘리베이터·계단실이 있는 코어 부분에서 하중을 고루 분산한다"며 "세대 내부에 기둥이 한두 개 있더라도 지하 주차장처럼 슬래브만 노출되는 부분이 길지 않아 전단보강근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형 건설사의 설계 담당자도 "우리가 시공한 대부분의 무량판 복합구조 아파트는 기둥이 많지 않고, 있다고 해도 전단보강근을 쓰지 않았다"며 "벽과 코어가 하중을 분산하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보강근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택업계는 판상형 무량판 복합구조 아파트의 경우 펜트하우스 등 초대형 평형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단보강근을 안 쓴 곳이 많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건설사들은 입주민의 불편 등을 고려해 국토부와 전문기관이 1차로 설계·구조도면 검토를 거친 뒤, 설계나 구조계산 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세대 내 현장 점검을 하는 방향으로 진행해줄 것을 제안했다. 먼저 도면으로 구조 설계에 대한 결함을 찾아낸 뒤 문제가 있을 경우에 한해 현장 조사를 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토부는 일단 난색을 표하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전단보강철근이 없다고 해도 무량판 구조 자체의 안전 문제가 불거진 만큼 국민적 불안감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현장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본다"며 "전단보강근이 없더라도 무량판 구조의 하중에 문제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콘크리트 강도 등을 조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토부는 입주자가 있는 세대 내 점검 방식에 대해서는 구조안전 외부 전문가 등의 자문을 얻어 다음 주에 최종 방식을 확정할 방침이다.
다만, 고층 주상복합아파트를 비롯해 판상형이 아닌 둥근 '타워형'으로 지어진 아파트는 무량판 공법의 기둥이 많이 쓰여 세대 내 조사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판상형은 건물 좌우에 벽체가 하중을 떠받치고 있지만, 타워형은 건물 외부가 모두 베란다로 둘러져 있어 벽이 아닌 기둥을 많이 쓰고 건물 내부에도 엘리베이터 등 코어 부분을 제외하고는 기둥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이 때문에 기둥 부분에 전단보강근이 쓰인 경우도 많다.
주택업계는 이날 국토부에 서울주택도시공사(SH)와 경기도시주택공사(GH) 등 지방공사는 물론 전국의 지방자치단체까지 무량판 아파트에 대한 자체 전수조사에 나서면서 '중복 조사'에 대한 대책 마련도 촉구했다.
주택업계에 따르면 국토부가 전날 조사 대상으로 업계에 통보한 293개 단지 가운데 약 30곳은 SH와 GH 등 공공의 전수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단지는 SH나 GH 등 지방 공기업이 진행하는 현장 조사를 받고, 국토부가 주도하는 조사도 받아야 할 처지다.
조사 대상 아파트 중 일부는 2017년 입주해 4년 주기로 진행되는 정밀안전점검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정밀안전점검을 받은 단지도 있고, 정부·공기업·지자체가 각각 따로 전수 조사를 선언하면서 중복·과잉 조사가 우려된다"며 "사전 조율 없이 급하게 앞다퉈 조사 대상부터 공개하면서 업체만 난처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 민간 무량판 단지 60여곳 추가…조사 대상·방식 발표 '졸속'
전문가들은 정부가 조사 대상과 조사 방식도 제대로 확정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발표부터 강행하면서 조사가 졸속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냐며 우려하고 있다.
정부는 전날 민간 조사 대상 아파트들 가운데 입주 단지를 188개 단지로 발표했으나 이날 한국주택협회와 대한주택건설협회에 무량판 공법이 적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 입주 단지 60여 곳을 조사 대상에 추가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사 대상 아파트도 확정하지 않은 채 발표부터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전체 조사 대상 민간아파트도 293개에서 350개 가까이 늘어날 전망이다.
국토부는 통상 3개월인 점검 기간도 두 달 이내로 단축해 다음 달 말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는 방침이다.
한국주택협회 관계자는 "LH도 인천 검단 지하주차장 붕괴 사고 이후 91개 현장을 전수조사하는데 석 달이 걸렸는데, 293개 현장을 전수조사하면서 2개월 내 마무리가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LH는 지하 주차장만 문제가 됐지만 민간은 주거동이 포함돼 있고, 심지어 188개 단지 15만 가구에는 입주민이 거주하고 있어 입주자 동의를 받아내는 것만 해도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건설업계에서는 무량판 구조를 정부가 권장해놓고 이제 와서 안전에 취약한 위험한 공법으로 매도해 민간까지 화살이 돌아오게 됐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국토부는 '100년 주택'으로 불리는 장수명주택 건설을 독려한다며 라멘(기둥+보) 구조와 무량판 구조 등을 적용한 아파트에 대해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 시 용적률 인센티브를 줬다.
리모델링이 쉬운 아파트를 공급해 재건축을 통한 자원 낭비를 막고 집값 안정에도 기여한다는 취지였다.
정부는 주거동에 무량판 구조를 적용하면 분양가 상한제 적용 시 완전 무량판은 5%, 벽식과 무량판 복합 구조에는 3%의 가산점도 부여했다.
이 때문에 2017년 분양가 상한제 부활 이후 분양가를 높게 받기 위해 무량판 혼합 공법을 요구하는 조합이 적지 않았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정부가 사실상 무량판 시공을 권장한 것인데 이제 와서 안전에 취약한 공법 취급을 하니 당혹스럽다"며 "앞으로 입주민들의 불안을 어떻게 잠재울 것인지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중견 건설사의 한 관계자는 "전수조사하면 안전에 지장은 없더라도 콘크리트 강도, 설계 오류 등에서 여러 크고 작은 문제가 나타날 수 있어 상당한 파장이 우려된다"며 "안전에 문제가 없는데도 주민들이 막대한 피해보상이나 전면 재시공이라도 요구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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