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르코스, ICC 압박에 "마약단속 재활·치료 위주로"
소탕작전 '수위조절' 표명…작년 6월 취임 후 350명 숨져
인권단체 "초법적 처형 계속 자행…정의구현 외면"
(하노이=연합뉴스) 김범수 특파원 = 국제형사재판소(ICC)가 필리핀 정부를 상대로 수천 명의 희생자가 나온 '마약과의 전쟁' 조사 재개를 결정하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단속 수위를 조절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25일 외신·현지 언론에 따르면 마르코스 대통령은 전날 취임 후 두 번째 국정 연설에서 "이제 불법 마약 단속 캠페인은 새롭게 진행된다"면서 "지역 사회 단위에서 치료·재활·교육에 나서고 중독자의 마약 의존도를 줄이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마약 범죄 조직과는 계속해서 가차 없이 싸우고 마약 거래에 연루된 경찰에 대한 단속도 철저히 진행하겠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발언은 ICC의 마약과의 전쟁 조사 재개를 거부하기 위한 명분을 쌓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ICC는 2021년 9월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 시절 필리핀 정부가 벌인 마약과의 전쟁을 반인륜 범죄로 규정하고 검사실의 정식 조사를 승인했다.
이에 필리핀 정부는 같은 해 11월 자체 실태 파악을 이유로 조사 유예를 신청하고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해 ICC 조사는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나 ICC는 지난 18일(현지시간) 카림 칸 검사장이 마약과의 전쟁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하도록 허가했다.
그러자 필리핀 정부는 곧바로 성명을 내고 대응에 나섰다.
필리핀 법무부는 "자체적으로 수사를 진행하겠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으며 이번 결정은 필리핀 정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마르코스 대통령도 지난 21일 기자들과 만나 "ICC는 필리핀에 대해 사법권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그들과 협력하지 않겠다"고 ICC 조사에 대한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이와 관련, 현지 인권 단체인 카라파탄은 "마르코스는 용의자에 대한 초법적 처형을 계속 자행하고 전 정권 시절의 희생자를 위한 정의 구현을 외면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마약 단속 방침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비판했다.
마르코스의 전임인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16년 7월부터 대대적인 마약 범죄 소탕 작전을 주도했다.
필리핀 정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경찰이 마약 복용자나 판매자가 곧바로 투항하지 않으면 총격을 가해 용의자 약 6천2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비해 ICC 측은 사망자 수가 1만2천∼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필리핀 국립대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마르코스가 작년 6월 30일 취임한 이후에도 마약 범죄 단속 과정에서 350여명이 숨진 것으로 파악됐다.
한편 이날 마르코스가 국정 연설을 진행하는 동안 수도 마닐라의 주요 도로에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모여 임금 인상과 고용 창출, 인권 보호를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일부는 정부가 무자비하게 마약 범죄 소탕 작전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마르코스를 닮은 인형을 불태우기도 했다.
bums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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