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피란 1년] ④ "전쟁 끝나도 한국 오래 살고 싶어…문제는 일자리"
우크라 고려인 피란 동포 300여명 설문…42%만 "종전되면 귀향할 것"
"취업 직종 제한된 비자 시스템 개선하고 구직 기회 늘려야"
(인천·서울=연합뉴스) 이상서 기자 = 고려인 동포 반 카테리나(38) 씨는 지난해 2월 모국인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 상황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한 달 내내 집 주변에서는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와 총성, 폭발음이 울렸다. 외출은 힘들었고, 식량을 구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피란할 곳을 찾던 와중에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같은 한국이었다. 2016년부터 인천에서 터를 잡은 남편을 비롯해 친인척들이 모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노모와 12살·3살 된 두 딸을 데리고 인접국인 몰다비아로 넘어가 루마니아와 폴란드 등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반씨는 같은 해 5월 22일 한국에 입국했다.
지난 16일 오후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에 있는 자택에서 만난 반 씨는 "초등학교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밝게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한국에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문제는 일자리"라고 말했다.
인천 남동국가산업단지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기가 힘든 탓에 반씨도 취업 전선에 뛰어들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국에서 제대로 재산을 정리하지 못하고 급히 들어왔다.
그는 "현재 취득한 방문취업(H-2) 비자의 경우, 취업 분야가 극히 제한됐고 3년마다 갱신해야 해 구직이 쉽지 않다"며 "앞으로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일자리를 얻고 싶다"고 말했다.
◇ 한국에 뿌리내리고 싶지만…일할 곳 없나요
우크라이나 고려인 동포가 한국으로 피란한 지 1년이 넘어가면서 이들이 우리 사회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일자리 확보가 선결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해 10월 사단법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지난해 한국으로 피란한 우크라이나 고려인 동포 342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종전이 되면 우크라이나로 돌아가겠다고 밝힌 비율은 42.4%에 그쳤다.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로는 '갈 곳 없음'(29.7%), '전망 없음'(27.1%), '자녀의 미래를 위해'(24.3%) 등을 꼽았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관계자는 "여성들도 남편과 함께 경제활동을 해야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취업을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들어온 인재가 능력에 걸맞은 직업을 얻을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며 "특히 미성년 아동의 경우, 대부분 2개 이상의 언어를 할 수 있기에 국가에서 미래 자원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취업 자체가 어려울뿐더러, 양질의 일자리를 얻기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지난해 우크라이나에서 입국해 함박마을 근처 인천 남동산단에서 일하는 고려인 동포 A씨는 "스마트폰 부품 공장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며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2년마다 새 일터를 구해야 하는 게 불안할 따름"이라며 "경력이 쌓여도 월급이 인상되지 않기에 가족을 부양하기가 여간 빠듯한 게 아니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 "비자 시스템 개선하고 취업할 수 있는 분야 넓혀야"
고려인 단체들은 지난해 초 우크라이나 전쟁을 피해 입국한 고려인 동포 가운데 노인이나 부녀자, 아동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을 부양하기 위한 고려인 가장들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가 이전보다 무거워졌다고 파악했다.
고려인 지원단체 '너머'의 김진영 인천상담소장은 "고려인들이 일자리를 찾을 때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이 '잔업 많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주된 취업 분야가 저임금의 제조업인 데다가, 고용 형태도 일용직인 경우가 많은 탓에 홀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선 월급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김 소장은 "우리 사회에 고려인 동포가 안착하기 위해 필수 요소는 '일자리'라며 "고국에서 농사를 삼모작까지 지을 정도로 성실한 이들에게 제대로 일할 기회를 달라"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국내 체류하는 동포들이 직업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비자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국내 체류 우크라이나 출신 고려인 동포 3천475명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1천864명이 재외동포(F-4) 비자를, 883명이 방문취업(H-2) 비자를 받았다.
사실상 취업 분야에 제한이 없는 F-4 비자와 달리 H-2 비자의 경우, 단순 노무만 할 수 있고 체류 기한도 3년이기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고, 체류 조건도 불안정하다.
김도균 제주 한라대 특임교수(전 제주출입국외국인청장)는 "국내 체류 동포에게 주어지는 두 비자를 F-4로 일원화해야 한다"며 "개개인의 특성과 능력이 아닌 출신 국적으로 판별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F-4 비자는 주로 미국이나 서유럽 등 선진국 출신 동포에게, H-2는 중국이나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등 개발 도상국 출신 동포에게 주어지고 있는 실정을 염두에 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인구 감소로 인해 구인난을 겪는 우리 현실에 이들은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지자체와 법무부 등 정부가 머리를 맞대 체류 시스템을 개선하고, 국민적 공감대도 얻는 데 힘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shlamaz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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