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대관식] 국왕의 첫 육성 기도 "내가 모든 믿음에 축복이 되기를"
경건·화려함속 1천년 전통 과시…'새시대' 반영, 흑인·여성 역할 부각
규모 줄었지만 비용은 오히려 증대…환호 인파 속 군주제 반대 시위도
'갈등' 해리 왕자 빠진 왕실 가족인사…이번에도 70년전처럼 '우중 대관식'
(런던·브뤼셀=연합뉴스) 최윤정 정빛나 현혜란 특파원 = 6일(현지시간) 70년만에 열린 영국 국왕 대관식은 1천여년 전통을 유지한 가운데 경건하면서도 화려하게 치러졌다.
동시에 처음으로 영국 국교회 외에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참석하고 여성 사제가 처음으로 성경을 낭독하는 등 다양한 현대적 가치를 반영하려 노력한 것으로 읽힌다.
◇ '섬기는 소명' 강조한 대관식…역대 국왕 중 첫 공개기도
찰스 3세는 이날 오전 런던 버킹엄궁에서 커밀라 왕비와 함께 '다이아몬드 주빌리 마차'를 타고 왕세자 책봉 이후 65년간 기다린 '대장정'에 나섰다.
대관식이 열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하는 '왕의 행렬'이 시작된 것이다.
간간이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긴 했지만, 이때만 해도 찰스 3세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역대 국왕들이 대관식 때 전통적으로 입은 '국가 예복(Robe of State)'을 걸치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도착한 찰스 3세의 대관식은 '섬기는 소명'을 주제로 영국 국교회 최고위 성직자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가 집전했다.
승인(Recognition), 서약(Oath), 성유의식(Anointing), 왕관 수여식(Investiture), 즉위(Enthronement) 등 순서로 진행됐다.
전통 순서에 따른 것이지만, 역대 대관식에서는 없던 장면도 적지 않았다.
특히 서약에 이어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소리를 내 특별 기도문을 낭독했는데, 이는 역대 국왕 중 첫 사례다.
그는 "내가 당신의 모든 자녀와 모든 믿음과 신앙에 축복이 될 수 있기를, 우리가 함께 온유함의 길을 찾아내고 평화의 길로 이끌릴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기도했다.
대관식에서 군주가 '모든 믿음과 신앙에 축복'을 거론한 건 처음이다.
웰비 대주교는 성유 바르기 의식에 이어 보석 444개가 박힌 무게 2.23㎏의 대관식 왕관(성 에드워드 왕관)을 찰스 3세에게 조심스럽게 씌웠다. 이어 그가 "신이여 국왕을 보호하소서"(God Save the King)라고 외치자 참석자들이 이를 제창했다,
신과 국민들 앞에서 찰스 3세 국왕이 '이견이 없는(undoubted)' 왕임을 확인하는 동시에 공식적으로 '찰스의 시대(Carolean Era)'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순간이다.
이어 커밀라 여왕은 1911년 메리 왕비가 대관식 때 쓴 왕비관을 받았다.
◇ '힌두교' 英총리가 성경구절 낭독…다양성·간소화 노력
이날 대관식은 흑인, 여성, 다른 종교 지도자 등이 예식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특징이다.
대관식에 가장 먼저 입장하는 성직자 행렬에는 국교회 외에 무슬림, 힌두, 시크, 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이 동참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 역시 힌두교도지만, 총리로서 성경 골로새서 1장 9절에서 17절을 낭독했다.
이와 함께 여성 사제가 대관식 역사상 처음 참석하고, '흑인 여성' 플로라 벤저민 남작이 국왕의 비둘기 홀을 드는 등 과거와는 달리 여성의 역할이 부각됐다.
1% 정도에 불과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 때와 달리 오늘날 타민족 출신 영국인이 25%에 달할 정도로 다문화 사회가 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해 전통과 현대적인 가치 간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으로 읽힌다.
이날 대관식에서는 처음으로 찬송가가 영어 외에 웨일스어 등 다른 언어로도 불린 것도 같은 연장선이다.
물가 급등 등으로 영국의 좋지 않은 경제상황을 고려해 70년 전과 달리 규모는 축소됐다.
왕실에 따르면 이날 대관식에는 국내외 귀빈 2천여명이 참석했다.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당시 국내외에서 8천여명이 초청됐고 이 중 영국 귀족만 910명이 참석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다만 '혈세 논란' 낭비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이날 대관식 비용은 최소 1억 파운드(약 1천685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5천600만파운드(약 944억원)로 추산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 비용의 2배다.
규모는 줄었지만 '간소한 대관식'이라고 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왕비 전남편부터 각국 인사·스타들 참석…'갈등' 해리 왕자는 인사치레만
대관식에 초청된 인사들의 면면도 눈길을 끌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대신해 부인 질 바이든 여사가 손녀 피네건과 함께 대관식에 참석했고, 우크라이나 영부인 올레나 젤렌스카 여사는 데니스 슈미할 우크라이나 총리와 함께 일찌감치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은 한덕수 국무총리가 자리했다.
존 메이저,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데이비드 캐머런,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등 전직 총리와 리시 수낵 현 총리 등 살아있는 전현직 총리 8명도 모두 참석했다.
찰스 3세와 '불륜'으로 세간의 지탄을 받다 이번 대관식에서 비로소 '왕비(Queen)' 칭호를 공식 사용하게 된 커밀라 왕비의 전남편 앤드루 파커 볼스도 대관식에 직접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커밀라 왕비와 파커 볼스는 1973년 결혼해 슬하에 두 남매를 뒀으나 1980년대 별거하고 1995년에 이혼했다. 커밀라 왕비는 2005년에 찰스 3세 국왕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밖에 대관식 콘서트 무대에 서는 미국의 유명 가수 케이티 페리, R&B 거장 라이오넬 리치, 호주 가수 닉 케이브, 영국 배우 에마 톰슨 등 연예인도 참석했다.
왕실 가족의 '갈등'은 이날 대관식에서도 우회적으로 표출됐다.
왕실과 갈등을 빚다 2020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떠난 찰스 3세의 차남 해리 왕자는 부인 메건 마클 없이 홀로 대관식에 참석했다.
대관식에서는 다른 왕실 가족들과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으나, 예식이 끝난 뒤에는 곧장 자리를 떴다.
이에 따라 찰스 3세가 대관식을 마치고 버킹엄궁으로 복귀해 다른 왕실 가족들과 함께 '발코니 인사'를 할 때는 불참했다.
갈등의 중심에 있는 형인 윌리엄 왕세손과는 대관식에서도 2줄 떨어진 자리에 앉았고,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도 화면에 별도로 포착되지 않았다.
◇ 빗속 우비 쓰고 '황금마차' 환호…반(反)군주제 등 곳곳서 시위도
21세기 보기 드문 역사적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런던 곳곳은 일찌감치 '명당'을 차지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며칠 전부터 작은 텐트와 접이식 간이의자를 들고 도착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찰스 3세의 할아버지인 조지 6세, 모친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때와 마찬가지로 내내 비가 추적추적 내린 날씨에도 우비를 쓰고 거리를 지켰다.
대관식이 끝난 뒤 버킹엄궁으로 복귀하는 찰스 3세 부부를 기다리던 시민들은 동화책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황금마차'가 등장했을 때도 일제히 환호하며 저마다 '인증샷'을 찍기 바빴다.
황금마차는 찰스 3세의 할아버지인 조지 3세 국왕 재위 기간인 1762년 제작됐으며 1831년부터는 대관식 때마다 사용됐다. 무게가 4t(톤)에 달해서 왕실 회색 말 8필이 끌며 걷는 속도로만 움직일 수 있다.
이날 대관식 사고 방지를 위해 일찌감치 '철통 경비'를 예고한 경찰과 시위대가 한때 충돌하는 상황도 일부 빚어졌다.
대관식에 앞서 트위터를 통해 반 군주제 시위자들에 대한 "중대 경찰 작전"이 진행됐고, 반군주제 단체인 '리퍼블릭'(Republic) 대표 그레이엄 스미스를 포함한 항의 시위자들이 일부 체포됐다.
경찰은 이들에게 치안 방해 혐의를 적용했다.
아울러 대관식에 맞춰 시위를 벌인 환경 운동단체 소속 회원들도 최소 19명이 현장에서 검거됐다고 유로뉴스는 전했다.
런던 경찰은 이날 대관식 행사를 위해 인력 총 1만1천500명가량을 치안 유지에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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