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이민 60년] ① 기회의 땅 찾아 2만㎞ 항해, 이젠 한류 전초기지로
1963년 브라질에 103명 첫발…남미·동남아 이주 붐으로 확산
영농이민 실패 뒤 대부분 도시 정착…의류업 등 통해 부 축적
부침 거치며 한인공동체 형성…12일 상파울루서 한복 퍼레이드
(상파울루=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대한민국 정부에서 추진해 구성된 최초의 집단 영농 이민단이 이역만리 브라질 땅을 밟은 지 오는 12일로 꼭 60주년을 맞았다.
지금은 생소한 개념인 집단 이민은 더 좋은 곳에서 살고자 하는 개인적 열망과 전후 불거진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국가적 필요성이 맞닿은 선택이었다.
준비 부족과 척박한 풍토라는 벽에 가로막혀 이상과 현실의 극명한 차이를 노출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지구 반대편에 끈끈한 한인사회를 형성하는 자양분을 만들면서 또 다른 60년의 번영을 꿈꾸게 하는 개척의 역사가 됐다.
◇ 55일간 이어진 2만㎞ '대항해'
첫 영농 집단 이민단은 103명으로 구성됐다. 군인, 버스 기사, 의사 등 직업군은 비교적 다양했는데, 영농 이민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농사 경험이 없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1962년 12월 18일 정오에 언론, 친인척, 지인, 학생들의 대대적인 환송 인사와 눈물 젖은 애국자 제창 속에 103명을 태우고 부산항을 떠난 네덜란드 선박 치차렌카(Tjitjalenka) 호는 55일간의 항해를 이어갔다.
일본 오키나와,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페낭, 모리셔스, 모잠비크 마푸투,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과 케이프타운 등에 차례로 정박했던 이 배는 1963년 2월 9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를 거쳐 같은 달 12일 최종 목적지인 산투스 항에 도착했다. 전체 바닷길만 2만㎞가 넘었다.
한인들은 피로감, 설렘, 두려움 속에 지구 반대편 낯선 나라에 발을 내디뎠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공식 집단 이민 첫 시작이었다.
이들은 과라레마 '아리랑 농장' 또는 봉수세수 '서울 농장' 등에 입주하거나 다른 농장에 취직하며 브라질에 정착해 갔다.
◇ 집단이민 본 궤도…농촌 대신 도시로
1차 이민을 포함해 1963년부터 1966년까지 5차례에 걸쳐 1천300여 명이 브라질 땅을 밟았다. 1971년에는 1천400여 명의 기술 이민자가 브라질로 대거 이주했다.
주변 다른 남미 국가로의 이민 행렬도 이어졌다.
아르헨티나로는 리오네그로주 라마르케 개간지를 무상 임대받는 형식으로 영농 이민단이 들어왔고, 파라과이에서는 한국의 사업가 이관복씨가 당시 파라과이 정부 실권자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이주 허가를 받아내며 이민이 시작됐다.
그러나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이민자들의 꿈은 도착하자마자 망가져 갔다. 이들은 농장 경영에 필요한 토지와 자금 부족 또는 일천한 농사 경험 등의 문제로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변변한 농기구도 없는 데다 독충과 싸우며 끼니를 해결하느라 고군분투했다고 한다. 주거지 마련 전 이민 수용소에서의 생활 조건도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또 하나 커다란 걸림돌은 아이들의 교육 문제였다. 학령기 자녀를 데리고 넘어온 이민자들은 교육에 대한 높은 열의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해야 했다.
결국 이민자들은 대부분 브라질 상파울루,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파라과이 아순시온 등 대도시로 재이주했다. 그러면서 '영농 이민'이라는 당초의 구상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 의류업으로 전성기…90년대 인플레이션 직격탄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한 한인들은 대부분 생존을 위해 소상공업, 특히 의류업을 택했다. 브라질의 경우엔 농업 이민자 생활을 정리하고 대도시로 나오면서 옷을 내다 팔며 정착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1980년대에는 연고자 초청 등을 통해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한인 사회도 양적·질적으로 빠르게 성장했고, 한인들이 운영하는 의류업체도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현지에서 '제품업'이라고도 부르는 한인 의류업은 나라 경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만큼 규모가 팽창했는데, 브라질에서는 한때 중·고가 여성 의류 시장의 절반을 장악할 정도였다.
당시 엄청난 부도 축적했는데, '돈이 너무 많아 그냥 침대 아래에 쌓아둘 정도'라는 말이 전혀 과장된 게 아닐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상파울루의 경우 시내 봉헤치루(Bom Retiro)와 브라스(Bras)를 중심으로 5만여 명의 한인이 거주하는 견실한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그러나 호황도 잠시, 1990년대 들어 연간 인플레이션 1천∼3천%에 달하는 상상 초월의 인플레이션 직격탄을 맞으면서 한인 사업체들은 휘청거렸다. 당시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미국 등으로 재이주한 한인도 많았다.
◇ 업종 다변화…한류 인기에 제2전성기 도약 꿈
경제 위기를 거치며 봉헤치루를 중심으로 한 브라질 상파울루의 한인 커뮤니티는 현재 3만명 규모로 줄었고, 외양적으로는 예전보다 위세가 쪼그라든 모습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브라질 패션산업의 메카이자 한인타운이라는 내실을 다지기 위한 움직임은 점차 활기를 띠고 있다.
2018년 8월 봉헤치루에는 한국문화의 중심지로 상징하는 '우리' 상징물이 세워진 데 이어 지난해 8월에는 브라질-한국 공원 지정 기념식이 진행됐다. 또 중심 거리인 프라치스(Prates) 도로 명칭이 '프라치스-한국'(Prates-Coreia)으로 공식 변경되기도 했다.
상점 앞에 청사초롱 달기, 건물 외벽에 한국 전통 벽화 그리기, '한국 이민의 날'(2월 12일)과 '한국 문화의 날'(8월 15일) 제정 등 성과도 이뤄냈다.
지난해 2월부터는 매주 일요일 브라질 한인타운발전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주말 장터를 열고 있다. 한류 인기 덕에 젊은 세대가 K팝 공연을 즐기며 한식을 맛보는 색다른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황인상 상파울루 총영사는 "60년 전처럼 아직 브라질 사회에는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더 많은 사람이 한국을 좋아하고 한류를 즐길 수 있도록 봉헤치루 한인타운을 발전시켜 나가는 게 우리 후세대의 몫일 것"이라고 말했다.
후손들 역시 사회 곳곳에 포진하며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이민 1세대가 농업이 아닌 의류업으로 기반을 닦았다면 1.5세와 2세, 3세는 법조계, 의료계, 학계, 예술계 등 다양한 전문 분야로 진출하며 새로운 이민사를 쓰고 있다.
한인사회는 올해 이민 60주년을 기념하며 브라질 사회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한다는 비전을 갖고 새로운 60년을 맞이하기 위한 각종 이벤트를 마련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오는 12일 상파울루 한복판인 파울리스타 대로에서는 한인·브라질인 103명의 한복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13일에는 상파울루 주의회에서 이민 60주년 기념식도 열릴 예정이다.
wald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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