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시선] 이민자 덕분에 발전했지만 감정은 복잡한 미국
'용광로' 역사 자랑하면서도 중남미 불법 이민 등 국경 문제는 골치
유색인 이민 늘면서 갈등…이민자 통합 법·제도는 한국보다 발전
(워싱턴=연합뉴스) 김동현 특파원 = 미국에서 이민 정책은 늘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현안이지만 최근에는 더욱 그렇다.
남부 국경을 넘어오는 중남미 이주민이 논란의 대상인데 일반적으로 보수 진영은 더 엄격한 통제를, 진보는 더 개방적인 정책을 주장한다.
작년 여름부터는 공화당 주지사를 둔 텍사스와 애리조나 등 접경지역에서 불법 입국자를 버스에 태워 워싱턴DC와 뉴욕 등 민주당 도시로 나르기 시작했다.
'너도 한번 당해봐라'는 일종의 시위로 바이든 행정부는 공화당이 어려운 이들을 정치쇼에 이용한다고 비판했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명분으로 불법 입국자의 망명 신청을 허용하지 않고 바로 추방할 수 있게 한 '42호'(title 42) 정책의 존치 여부도 한창 논란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미국인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한편으로는 여러 국가의 이민자가 모여 만든 미국 사회를 '용광로'(melting pot)라고 자랑스러워하며 다양성과 통합을 핵심 가치로 선전한다.
그러나 이런 자부심은 유럽에서 백인이 바다를 건너온 과거에 주로 해당하는 듯하다.
오늘날 미국 이민의 주체는 중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의 유색인종이며 개발도상국 출신이 많다.
이들에 대한 시선은 과거처럼 우호적이지는 않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롯한 극우 정치권은 중남미 이주민에 "킬러와 마약상"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이들이 미국을 점령할 것이라며 불안을 부채질하기까지 한다.
2021년 미국 영주권을 받은 총 74만여명(국토안보국 통계) 중 멕시코 출신이 10만2천여명으로 가장 많은데도 중남미 이주민 전체를 범법자로 몰면서 이민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확산하는 형국이다.
주요 이민자 집단인 아시아계도 코로나19 이후 혐오 범죄 피해가 증가하는 등 더 어려운 환경에 직면했다.
필자가 작년 월셋집을 구할 때 "러시아와 중국인만 아니면 세계가 평화로울 것"이라는 부동산 중개업자의 농담에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너희가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별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이유다.
미국이 불법 이민으로 골치 아픈 상황은 이해하지만, 다수 이민자를 미국에 부담이 되는 존재로 비하하는 태도가 위선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미국 경제는 이민자의 노동력 덕분에 성장했으며 이는 정보기술(IT) 종사자 등 전문직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다수 미국 전문가의 평가다.
실제 코로나19 확산과 42호 정책 시행 이후 이민이 급감하자 이민자를 다수 고용했던 육류 포장과 주택 건설업, 농장 등에서 일손이 크게 부족했고, 이들 제품 공급이 차질을 빚으면서 인플레이션을 부추겼다.
미국 국민이 누린 저렴한 물가와 높은 생활 수준은 자신들이 꺼리는 고된 저임금 일자리를 이민자가 맡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워싱턴DC의 서비스업 종사자만 봐도 실감할 수 있다.
식당에서 주문을 받는 직원은 영어를 잘하는 백인이 많지만,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직원은 주로 중남미 출신이다.
건물 청소와 건설 등 영어 실력이 중요하지 않은 단순 노동직도 중남미인이 많다.
우버 드라이버는 더 다양하다. 모하마드, 호르헤, 하미드, 사미르, 블레 등은 중동과 아프리카, 중남미 곳곳에서 왔다.
이처럼 백인 중심이었던 이민자 구성이 훨씬 복잡해지고 과거보다 다양한 인종, 종교, 가치관이 뒤섞이면서 미국의 '용광로' 신화가 앞으로도 유효할지 검증대에 올랐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민자의 나라'를 자칭하는 미국의 이런 상황을 보면 한국은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을까에 대해 의문이 든다.
고령화와 저출산에 따른 인구 감소를 해결하려면 이민 확대가 답이라고 하지만, 이민 역사가 오래된 미국에 비해 외국인을 성공적으로 사회로 통합할 법, 제도가 미비해 보인다.
일례로 미국은 출신 국가나 민족, 인종, 피부색 등을 이유로 차별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차별금지법이 아직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영어를 하지 못하는 학생에게 별도의 영어 교육을 제공하지 않는 게 출신 국가에 따른 차별이라고 판결하기도 했다.
미국 학교에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을 위한 '영어학습자'(ELL: English Language Learners, 과거 ESL) 교육을 제공하게 된 원동력이 된 이 판결은 최근이 아닌 1974년에 나왔다.
2000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영어 실력이 부족한 사람도 정부 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라고 지시해 각 정부 기관에서 영어 외에 많이 쓰는 언어로 번역한 자료와 통역을 지원하게 됐다.
한국에도 이런 법·제도를 구축하려면 많은 자원과 시간이 필요하고 반대 여론도 설득해야 할 것이다. 이민 확대가 옳은 방향이라면 지금부터 꾸준한 준비가 필요하다.
blueke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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