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서 20일까지 공연…"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는 정체성 혼란"
(베를린=연합뉴스) 이율 특파원 = "독일 아이들이 거리에서 '칭창총' 이라고 하거나 눈을 위로 잡아당기며 놀렸는데, 그냥 참았어요. 부모님이 우리는 이 나라에 방문객일 뿐이니, 우리가 여기에 있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며 항의하는 것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셔서요."
"아버지가 너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항상 한 시간 더 일찍 일어나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어떤 독일인이건 너를 대체할 수 있다고 하셔서 저는 다른 애들보다 스스로 열등하다고 여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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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교포 1.5세대의 애환을 담은 퍼포먼스 '부유하는 뿌리'가 17일(현지시간) 밤 독일 베를린 독립 공연예술공간 탄츠파브릭에서 처음 선보였다.
이번 퍼포먼스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한인 소식지 등을 통해 모집한 독일 거주 한인 등 아시아 이민자 1.5∼2세대 17명의 애환에 대한 심층 인터뷰를 기반으로 마련됐다.
퍼포먼스에 참여한 1.5세들은 대부분 1960∼1970년대에 독일로 이주한 소위 파독 간호사나 광부의 자녀들이다. 베트남이나 몽골, 필리핀, 말레이시아 이민자 자녀들도 참여했다.
한인 1.5세들은 독일이나 한국 어디에도 완전히 속해있지 않다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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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는 뿌리'는 출신 국가나 정착 국가 모두에 뿌리를 내리고 싶지 않고, 뿌리를 내릴 수도 없는 1.5세의 유영하는 정체성을 빗댄 말로, 두 문화에서 안정감과 동시에 이질감을 느끼고, 정체성과 소속감을 명확히 규명할 수 없는 경계에 있는 느낌을 표현했다.
인터뷰 대상자 중 6명은 퍼포먼스에 출연했다. 이번 퍼포먼스의 연출과 안무, 작곡을 맡은 이인경 감독은 퍼포먼스 출연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안무 등을 익히게 했고, 출연자들은 공연 전날 리허설에서 처음 만나 함께 공연을 펼쳤다.
이 감독은 인터뷰에서 발췌한 내용을 토대로 사운드스코어를 만들어 배경으로 활용했다.
이번 공연은 재독 시민사회단체 코리아협의회가 베를린시 문화국의 지원을 받아 아시아 이민자 1.5세대의 생각을 부각하고자 1년여에 걸쳐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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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경 감독은 "전문적인 배우가 아닌 서로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이민 1.5세대가 처음 무대에서 만났을 때 느낌이 궁금했다"면서 "이민 1.5세대의 이야기를 공연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고, 이 공연은 바로 1.5세대에 관한 얘기이길 바랐다"고 말했다.
12세에 독일로 이주한 한인 1.5세대로 퍼포먼스에 출연한 이수남씨는 "공개모집에 응한 뒤 관심이 있어 퍼포먼스에도 참여하게 됐다"면서 "저하고 똑같은 개인사를 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재밌었고, 제가 그때 느꼈던 게 혼자 느낀 게 아니었다는 깨달음 속에 그때 느꼈던 것을 다시 많이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퍼포먼스는 오는 20일까지 계속 무대에 오른다.
yulsi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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