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英경제] 파운드화 뚝·신용등급 불안…경제규모 세계 6위로 밀려
신임 총리 대규모 감세정책 발표 후 신뢰 훼손…IMF 경고까지 망신
불확실성 가득…경기침체 직전에 물가·금리 급등
(런던=연합뉴스) 최윤정 특파원 = 영국 경제는 이미 브렉시트와 코로나19 충격이 누적된 상태에서 새 정부의 정책 헛발질이 겹치며 휘청이고 있다.
대영제국 시절의 영화는 사라졌더라도 준기축통화로서 몸값이 높던 파운드화의 가치는 뚝 떨어졌고 국가 신용등급 전망까지 하락하고 있다.
경제규모가 과거 식민지였던 인도 아래로 밀려난 가운데 1970년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재현된다거나 세계 경제위기를 촉발하는 문제아가 될 것이란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 파운드화 역대 최저…IMF 경고까지
영국 파운드화는 지난달 26일 미 달러 대비 환율이 1.03달러로 급락하며 사상 최저로 떨어졌다. 직전 최저 기록은 1985년 2월 26일의 1.05달러였다.
금융시장에선 연말에 파운드화 가치가 달러와 등가를 이루거나 심지어 그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속속 나왔다.
미 달러화 강세는 세계 각국이 겪는 일이지만 영국은 내부 문제가 더해지며 파운드화가 유독 크게 흔들렸다.
9월 초 출범한 리즈 트러스 총리 정부가 내놓은 50년 만의 최대규모인 450억 파운드(71조원) 감세안이 금융시장의 신뢰를 잃은 것이 '셀(Sell) UK'의 주요인으로 풀이된다.
트러스 총리는 선거운동 때부터 감세를 통한 성장을 내세웠는데 전문가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를 밀어붙이면서 그에 따른 지출 삭감계획을 내놓지 않았다.
이는 엄청난 규모로 나랏빚을 늘리겠다는 공개선언이나 다름없어 당장 채권시장에서 국채금리가 급등(채권 가격 급락)하는 부작용을 불러왔고 이는 다시 주식, 외환 등 금융시장 전반에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더구나 '미니 예산'이라고 불리는 이 예산안을 발표할 때 처음으로 독립기구인 예산책임청(OBR)의 재정전망을 함께 내놓지 않아 시장의 의구심은 더욱 커졌다.
영국 중앙은행(BOE)이 양적완화 때 매입한 채권을 10월부터 매도하겠다고 밝힌 바로 다음 날 정부가 대규모 채권 발행이 예상되는 정책을 발표한 것도 문제였다.
쿼지 콰텡 재무부 장관은 주 2회 BOE 총재와 회동해 정책 협의를 하겠다고 하고선 손발이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러자 국제통화기금(IMF)이 감세정책 철회를 촉구하면서 이례적으로 주요 7개국(G7)의 경제정책에 공개적으로 개입하고 나섰다. 영국 재정문제가 심각해지며 세계 경제 위기로 번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국제 신용평가사들도 연이어 영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하향 조정하거나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피치가 영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고 무디스는 구조적 재정적자 위험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정부 정책 신뢰 회복 난망…불확실성 가득
정부가 초래한 금융시장 대혼란은 부자 감세 철회와 BOE의 채권시장 대규모 개입으로 일단 진정됐다.
BOE는 채권금리 급등으로 연기금들이 보유채권을 처분해야하는 상황에 몰리자 650억파운드(103조원) 규모 긴급 채권매입 계획을 발표하고 양적긴축(QT)까지 한 달 연기했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일 뿐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아 언제든 금융시장 불안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무엇보다 정부 신뢰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트러스 총리가 한발 뒤로 물러나면서 정책방향을 수정하는가 했으나 곧이어 보수당 전당대회에서는 다시 감세가 옳다면서 기존 입장을 강조했다.
이 때문에 파운드화 환율은 여전히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런던 금융시장 한 관계자는 8일 "트러스 총리가 의견을 듣는다고 했지만 시장 참가자들은 아직 믿을 수가 없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금융시장에선 BOE가 이에 대응해서 결국 양적긴축 계획을 잠정 연기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렇게 되면 BOE의 신뢰까지 흔들리게 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영국 정부는 감세안을 발표한 9월 23일에 신뢰를 잃었고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상황이 더 악화했다"며 "이는 트러스 총리뿐 아니라 영국 경제에도 나쁜 소식"이라고 지적했다.
◇경기침체 직전…브렉시트·여왕 서거 후 내리막 어디까지
영국은 코로나19로 2020년 GDP가 무려 11% 뒷걸음질하는 등 주요국 중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데 이어 최근 세계 공급망 문제에서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로 인해 영향을 다른 나라보다 크게 받았다.
G7 중 유일하게 코로나19 이전 경제규모를 회복하지 못했는데 물가 상승률은 약 10%로 G7 중 가장 높다.
3분기 성장률이 0.2%로 간신히 기술적 경기침체 조건인 2개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피한 상태다.
즉 성장 동력이 약한데 물가가 뛰어서 이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하고 그러다 보면 소비여력이 위축돼 경기가 더 얼어붙는 악순환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금융시장에선 BOE가 다음 달에 금리를 한 번에 1%포인트 인상하는 자이언트 스텝을 밟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러다 보면 생계비와 대출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쓰러지는 가구가 속출할 우려가 있다.
해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일각에선 영국이 대영제국에서 일반 국가로 내려앉은 데 이어 한 단계 더 떨어지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세계 국내총생산(GDP) 5위이던 영국은 작년 4분기부터 인도와 자리를 바꿔 6위로 물러났다. IMF 전망에 따르면 올해 연간으로도 인도가 영국을 앞선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로 대영제국의 이미지가 흐릿해지거나 영연방 영향력 약화가 예상되는 점도 영국의 저력에 대한 기대를 약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편으론 영국이 당장 심각한 위기에 내몰릴 정도는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영국은 신흥국과 달리 외화부채가 많지 않고 국가부도 위험 지표인 신용부도스와프(CDS) 5년물 프리미엄은 45bp로 조금 오르긴 했지만 이탈리아(163bp)에 비해선 훨씬 낮다는 점을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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