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상소 대신 첫 중재 성사…한미 세탁기 분쟁도 적용될까
EU-튀르키예, 상소기구 마비 상태서 우회적 분쟁 해결
양측 합의 있어야 가능…미국, 중재 원치 않을 듯
(제네바=연합뉴스) 안희 특파원 = 무역 분쟁을 벌인 국가들이 세계무역기구(WTO)의 1심 결정에 불복한 뒤 상소 대신 중재 절차를 밟은 첫 사례가 나왔다.
WTO 내 분쟁 상소기구가 위원 구성 문제로 사실상 마비된 상황에서 우회적 방식이면서도 상소 판정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는 중재 제도를 활용한 것이다.
26일(현지시간) 주 제네바 한국대표부 등에 따르면 유럽연합(EU)과 튀르키예가 벌인 WTO 상소심 사건에서 전날 첫 중재 판정이 내려졌다.
특히 우리나라의 정승화 무역위원장이 참가한 3명의 중재 판정부가 이 사안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는 점에서 더 큰 관심을 받았다.
이 사건은 튀르키예 정부가 외국산 약품 수입 허가 조건으로 자국에 해당 약품의 제조 공장을 설립할 것을 강제했다가 EU로부터 '보호무역 조치'라는 반발을 사면서 분쟁에 이르게 된 것이다.
1심 격인 패널 판정에서 EU가 승소한 뒤 양측은 상소 절차를 밟았지만 WTO에서 상소기구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상소기구와 관련해 구조적 우려가 있다고 주장해온 미국이 위원 선임 절차에 협조할 수 없다고 밝히면서 2019년 말부터 상소기구에 참여할 위원이 충원되지 않았다. WTO의 패널 판정 후 불복을 해도 이를 심리할 기구가 사실상 없었던 셈이다.
이런 가운데 WTO 분쟁 가운데 처음으로 EU와 튀르키예가 '분쟁해결규칙 및 절차에 관한 양해'(DSU) 25조에 따른 중재 조항을 활용, 중재에 회부하기로 합의하면서 상소기구를 대신할 우회적 분쟁 해결 절차가 도입됐다.
이번 중재 판정은 EU의 손을 다시 들어주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최종심에 해당하며 상소 판정과 동일한 효력을 지니는 만큼 분쟁은 이대로 매듭지어질 것으로 보인다.
2년 반이 넘도록 WTO에서 상소기구를 복원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번 중재 판정 사례는 국가 간 무역 분쟁 해결의 새로운 관행으로 자리 잡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일각에서 나온다.
우리나라의 경우, 상소 절차를 밟을 가능성이 있는 사안으로 미국과의 세탁기 분쟁이 있다.
미국은 2018년 2월부터 수입산 세탁기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보고 있다는 자국 업계의 주장을 수용해 세탁기 세이프가드를 시행하고 있고, 이에 한국 정부는 삼성과 LG를 사실상 겨냥한 불이익 조처라며 같은 해 5월 WTO에 제소했다.
WTO 패널은 올해 2월 한국의 손을 들어줬다. 이를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상소 절차를 밟게 되는데, 이에 앞서 양국은 WTO의 승인 아래 분쟁 해법을 모색하기 위한 협의 과정을 밟고 있다. 협의가 틀어지면 소송 절차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는 셈이다.
만약 다시 소송을 할 수밖에 없게 될 경우, 이번 EU·튀르키예 사례처럼 중재 판정을 활용할 수 있을지가 관심사가 된다.
그러나 EU·튀르키예 사례는 양측의 합의로 사건을 중재에 맡긴 것이지만 한미 세탁기 분쟁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관측이 많다.
WTO 체제하의 분쟁 상소 체계에 근본적으로 회의적 시선을 보내고 있는 미국이 중재 제도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자국에 불이익한 상소 체계를 구조적으로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미국으로선 중재 제도 역시 현행 시스템을 개편하지 않은 채 도입되는 보완적 제도라는 점에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prayer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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