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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서부거점 르비우에서] "아빠는 아조우스탈에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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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서부거점 르비우에서] "아빠는 아조우스탈에 남았어요"
마리우폴 최후항전지에 남은 군인 아빠 생사 몰라
고려인 3대 열흘 넘게 마리우폴 지하실서 숨어지내다 겨우 탈출
러시아→발트3국→폴란드→르비우…3천700㎞ 피란길


(르비우[우크라이나]=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열다섯 살 소녀 크리스티나는 마리우폴에서 탈출했다.
그는 "러시아군이 온 지 한주 만에 도시가 완전히 파괴됐고 시신이 도시 어디든 있었다"며 "시신을 묻을 수조차 없었다"라고 기억했다.
크리스티나는 외할머니, 엄마와 함께 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에 도착했지만, 군인인 아빠는 함께 오지 못했다.
"아빠는 아조우스탈에 남아 계세요"
이 아이에게 건넬 말을 찾으려고 노력해봤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번 전쟁에서 마리우폴은 최악의 반인권 범죄를, 아조우스탈 제철소는 우크라이나인의 필사적 저항을 상징한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병력이 버티는 아조우스탈을 두 달여 간 봉쇄하고 폭격을 퍼붓고 있다.
크리스티나와 엄마 옥사나(40)씨와 외할머니 리우보우(70) 씨의 얼굴은 유독 친근했다. 이들이 고려인이어서다.
옥사나 씨가 우크라이나 남성과 결혼해 크리스티나의 성은 '티셴코'가 됐지만 리우보우 씨의 성은 '이'씨다.
리우보우 씨는 거의 평생을 동부 도네츠크에서 살았고 크리스티나는 부모님과 함께 2018년 남부 해안도시 마리우폴로 이사했다.



크리스티나의 행복한 시간은 2월 24일 러시아의 포성이 시작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러시아는 2014년 무력으로 병합한 크림반도와 친러시아 반군이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마리우폴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크리스티나가 전쟁을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은 개전 4일째인 2월 28일부터였다고 한다. 이날부터 전기와 수도 공급이 끊겼다.
3월 1일이 되자 휴대전화 신호가 잡히지 않았고 가스가 끊겨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워 요리해야 했다.
"포격은 항상 새벽 4∼5시에 시작돼 온종일 계속됐어요"
3월 9일엔 크리스티나가 살던 아파트 바로 옆에 포탄이 떨어졌다.
다음날 개전 이후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던 아빠가 집에 와 짐을 싸서 아조우스탈 제철소로 들어갔다. 이후 크리스티나는 아빠를 직접 볼 수 없었다.
크리스티나의 아빠 올렉시 씨는 지난달 30일을 끝으로 연락이 끊겨 지금은 생사도 알 수 없게 됐다.


아빠가 떠난 날 크리스티나와 엄마는 지하실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는 12명이 숨어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엿새간 간 한 번도 지하실 밖을 나가지 못했다.
3월 16일 처음으로 지하실 밖으로 나온 크리스티나는 러시아 탱크 3대가 시내를 달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가장 앞에 있는 탱크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이자 체첸공화국의 수장 람잔 카디로프가 타고 있었다.
카디로프가 이끄는 체첸 민병대는 고문과 무법적인 살인 등 무자비한 인권 유린으로 악명이 높다.
크리스티나는 이들이 빈집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약탈하는 것을 봤다.
극한의 공포에 마리우폴을 떠나고 싶었지만 러시아군은 마리우폴 시민이 우크라이나군이 통제하는 서쪽으로 대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크리스티나와 옥사나 씨는 3월 22일 러시아가 장악한 도네츠크로 향하는 난민 버스에 올랐다. 도네츠크에는 할머니 리우보우 씨가 살고 있었다.
난민 버스에 타기 전 모녀는 휴대전화부터 던져버렸다. 휴대전화 때문에 우크라이나 군인의 가족임이 들통나면 목숨을 장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난민 버스가 도네츠크에 도착하자 피란민들은 러시아군의 신문부터 받아야 했다. 크리스티나와 옥사나에게 많은 질문이 쏟아졌지만 휴대전화를 버린 덕에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도네츠크에서 외할머니 리우보우 씨와 만난 두 사람은 약 한 달간 그곳에 머물렀다. 리우보우 씨가 심장병으로 입원 중이었던 탓이다.
리우보우 씨가 건강을 회복하자 이들 고려인 삼대는 러시아 점령지인 도네츠크를 떠나 르비우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최단 거리는 열차나 기차로 우크라이나 영토를 가로지르는 것이지만 안전을 위해 정반대 경로를 택했다.
도네츠크에서 서쪽이 아닌 동쪽으로 향해 러시아 본토의 로스토프로 갔고 그곳에서 승합차를 빌렸다.
이들을 태운 승합차는 북서쪽으로 약 2천400㎞ 달려 에스토니아에 도착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국을 육로로 관통해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다시 기차를 타고 우크라이나로 입국해 최종 목적지인 르비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동 거리만 약 3천700㎞에 달하는 대장정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제가 겪은 일은 아주 끔찍하고 무서워요. 하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이 이 인터뷰를 읽어주면 좋겠어요. 그래야 더 많은 사람이 마리우폴의 어려움을 알고 도움을 줄 수 있겠죠"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무사히 돌아올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가 돌아오면 하고 그동안 못한 말을 다 하고 싶어요. 아빠도 이 인터뷰를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면 아빠도 힘을 낼 수 있을 거예요"




kind3@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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