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뒤 역사] '민주주의의 병기창'을 유일 초강대국으로 만든 무기대여법
참전반대 여론 달래며 단계적으로 연합국 지원하려 한 루스벨트의 심모원려
대공황 탈출·달러 기축통화 지위에도 일정한 역할
[※편집자 주 : '뉴스 뒤 역사'는 주요 국제뉴스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건, 장소, 인물, 예술작품 등을 찾아 소개하는 부정기 연재물입니다.]
(파리=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 "내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나한테 긴 정원용 호스가 있다고 칩시다. 어떻게 할까요? 나라면 옆집 사람에게 '이 호스 사느라고 15달러가 들었으니 내게 15달러를 내세요'라고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나는 15달러를 받기보다는 불이 꺼진 뒤에 호스를 돌려받으려고 할 겁니다."
1940년 12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한창 논란을 빚고 있던 무기대여법안(Lend-Lease Bill)에 관해 이런 비유를 들었다. 프랑스마저 허망하게 무너지고 자유진영에서 홀로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맞서던 영국도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때였다. 무기대여법이 제정되면 '현찰'이 바닥난 영국이 계속 싸우는 데 필요한 무기를 미국이 대여 또는 양도할 수 있게 된다.
며칠 뒤 루스벨트 대통령은 라디오로 방송된 노변담화에서 미국이 세계 정복을 꿈꾸는 나치 독일에 맞서는 영국을 돕기 위해 '민주주의의 병기창'(Arsenal of Democracy)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지금 영국을 도와야만 나중에 미국이 직접 싸우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는 것에 관해선 일반 국민의 여론이 극도로 부정적이었다. 되도록 유럽의 갈등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고립주의 전통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결정적으로는 1차 세계대전의 트라우마가 너무나 생생했다.
이런 국민적 감정에 편승해 미국 의회는 유럽의 정세가 험악해지기 시작한 1935년 이후 일련의 '중립법'을 제정해 어느 편이든 무력분쟁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 교전 당사국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도 금지했다. 개인적으로 나치를 깊이 혐오했던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이런 정서를 잘 알았던 터라 3선에 도전한 1940년 대선에선 '전쟁 불참'을 공약으로 내세워야 했다.
그는 언젠가 나치와 맞서야 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지만 서두르지 않고 국민이 나치의 사악함을 깨닫게 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구매 대금을 현금으로 미리 지급하고 구매자 책임하에 운송한다는 조건으로 교전 당사국, 즉 영국과 프랑스에 전쟁 물자를 판매할 수 있도록 중립법이 개정됐다.
무기대여법 제정 움직임은 이처럼 강한 반전 여론과, 이로 인한 무기 수출 금지 정책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던 상황에서 본격화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쳐놓은 '덫'에 걸려든 것처럼 나치는 프랑스를 정복하고 영국의 도시를 맹폭한 것 이외에도 잠수함을 동원해 미국의 상선과 여객선을 공격하는 등 호전적 행위로 미국인의 공분을 자초했다.
이처럼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무기대여법은 상·하원을 통과해 1941년 3월 11일 법률로 발효됐다. 이에 따라 미국산 무기와 전쟁 물자가 막대한 규모로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 소련, 중국 등에 '대여'되기 시작했다. 벼랑 끝으로 내몰렸던 연합국은 원기를 회복했고 파시스트 국가들은 크나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 침략 이후 미국의 금수조치로 고통받던 일본은 당시 공식적으로는 '교전국'이 아니었던 중국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무기 지원으로 대외 팽창의 한계에 직면하게 되자 진주만 공습이라는 무리수를 던지게 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즉각 일본제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곧이어 일본의 동맹인 독일이 미국에 선전포고했다. 이제 미국이 함께 싸우는 동맹국을 위해 전쟁물자를 공급하는 데 걸림돌은 완전히 사라졌다.
1945년 9월 공식 종료된 무기대여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이 동맹국들에 지원한 물품은 모두 500억달러 어치가 넘었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7천억달러(약 860조원) 이상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물량이다. 여기에는 항공기, 탱크, 대포, 차량, 소총, 탄환, 연료 등 전쟁에 필수적인 무기와 물자는 물론 식량에서 건설장비, 철도장비와 의류에 이르기까지 온갖 상품이 포함됐다.
혹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축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는 '인계철선'이 될 것임을 잘 알면서도 오히려 이를 노려 무기대여법을 입안했다고 하지만 이는 확인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병기창'이 본연의 사명을 120% 달성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무기대여 프로그램은 '악의 세력'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막는 데 크게 기여했고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끎으로써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의 지위를 확립했다.
무기대여 프로그램의 기본 원칙은 무상으로 대여하고 용도가 다한 뒤 돌려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경제적으로는 미국의 손실로 기록됐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보면 미국이 얻은 무형의 이득이 훨씬 컸다. 경제학자 가운데 다수는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을 확실히 끝낸 계기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 후 군수 부문의 호황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이 어떤 형태로든 전쟁물자를 대규모로 수출할 수 없었다면 대공황에서 탈출하는 것이 그만큼 힘들어졌을 것이다.
또 일부 유상 무기대여 프로그램과 전후 마셜 플랜의 집행 과정에서 미국이 세계 최대 채권국으로 부상한 것은 달러가 기축통화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밖에 영국이 지원받은 물품 대금의 일부로 양도한 여러 첨단 기술은 미국의 산업이 더욱 발전하는 데 도움을 줬다.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를 위해 미국이 무기를 포함한 막대한 규모의 지원 계획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이를 두고 많은 언론 매체가 '무기대여법'을 떠올린다. 미국이 다시 '민주주의의 병기창'이 되는 것은 미국을 위해, 또 세계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때의 예에서 보듯 전쟁물자 지원은 언제든 전쟁 참여로 이어질 공산이 있다.
당시와 지금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미국과 러시아의 전면전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이다. 미국의 행보는 80여년 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만 한다.
cwhy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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