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 외면 시작된 러 원유·가스, 중국이 쏙 가져가나
미·유럽, 수입제한 검토 속 중러 정상회담 때 체결된 장기계약 다시 주목
中 국제유가 폭등 속 싸게 살 수도 있지만 미중 대결로 전이 위험 요인도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미국과 유럽 동맹이 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를 논의하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계적으로 러시아 원유와 천연가스 구매를 꺼리는 움직임이 벌써 본격화하고 있다.
세계 수요가 북해산 브렌트유 등 비(非)러시아산 원유로 몰리면서 국제유가가 폭등 중인 가운데 중국이 갈 곳을 잃은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 구매를 확대할 것인지에 시장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 에너지 수급 비상 걸린 중국에 매력적인 러 원유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최근 각국 원유 거래업체와 유럽 정유업체들이 러시아 원유 구매를 대폭 줄이고 있다.
원유 거래업체들은 물론 거래를 지원하는 은행, 물류회사 등이 서방이 이미 단행한 제재나 향후 추가될 수 있는 제재 등의 위험 요인을 고려해 러시아산 원유 거래에 관여하는 것을 꺼리면서 러시아의 에너지 수출에 가시적 타격이 가해지고 있다.
중국은 경제적 실익 차원에서도, 대외 전략 차원에서도 러시아 원유를 계속 살 동기를 충분히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우선 실익 측면에서 국제유가가 폭등 중인 가운데 중국은 다른 나라 바이어들이 떠난 러시아산 원유를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으로 살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실제로 지난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해 미국의 제재를 받게 됐을 때 중국은 판로가 위축된 러시아산 원유를 평균 국제유가보다 낮은 가격에 도입한 선례가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장기 집권 시대를 열 올가을 20차 당대회를 앞둔 중국은 올해 경제·사회 안정에 사활을 걸고 있다. 올해 5%대 경제성장률 달성이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중국은 경제 안정의 근간인 에너지 수급 안정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중국의 원유와 천연가스는 수입 의존도가 각각 72%, 44%를 넘기 때문에 에너지 가격 폭등 추세 속에서 상대적으로 가격 조건이 좋아진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는 중국에 더욱 매력적인 상품이 된 측면이 있다.
전략적 측면에서 봐도, 중국은 동맹에 가까운 전략적 우방인 러시아를 측면 지원하기 위해 판로가 막힌 러시아산 에너지 구매를 확대해줄 충분한 동기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당장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중국은 러시아를 정면으로 비난하지 않는 '친러적 중립' 원칙을 고수하며 미국과 유럽의 대러 제재에 반대한다.
중국 금융 수장인 궈수칭 은행보험감독관리위 주석(장관)은 지난 2일 "우리와 각 측은 정상적인 경제·무역 거래와 금융 거래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말해 서방의 추가 대러 제재에도 함께하지 않겠다는 뜻을 강하게 시사했다.
◇ 미 제재 예상한 중러, 초대형 원유·가스 계약으로 '에너지 동맹'
중국과 러시아는 지난달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방중 기간 가스·원유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이는 서방의 제재에 대한 사전 대비 성격이 강했다는 점에서 서방의 대러 에너지 제재가 가시화하는 현시점에서 다시 그 내용에 눈길이 간다.
중국은 원유와 천연가스의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다. 반대로 러시아는 국내총생산(GDP)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원유와 천연가스에 경제를 크게 의존하는 나라라는 점에서 에너지는 양국 간 전략적 이해관계가 가장 크게 맞아떨어지는 분야다.
푸틴 대통령의 방중 기간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 가즈프롬과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CNPC)는 연 100억㎥의 천연가스 거래 계약을 맺었다. 또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티도 CNPC에 향후 10년에 걸쳐 총 1억t의 원유를 중국에 공급하기로 했다.
전략적으로 특히 중요한 것은 가스관을 통해 이뤄지는 천연가스 추가 계약이다.
양국이 구체적 계약 내용을 밝히지 않았지만 로이터 등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이번에 체결된 추가 천연가스 계약 기간은 25년, 계약 추정액은 1천175억 달러(약 142조원)에 달한다.
새 계약 체결로 러시아는 향후 극동 사할린 인근 해저에 있는 유즈노 키린스코예 가스전에서 생산된 천연가스를 현재 가동 중인 사할린-블라디보스토크 가스관을 거쳐 중국에 공급할 예정인데 연결 구간 추가 공사 등을 거쳐 2∼3년 뒤부터 실제 가스 공급이 이뤄질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앞서 중러는 지난 2014년 향후 30년에 걸쳐 연 380억㎥의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초대형 가스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총 4천억 달러(약 482조원) 규모의 매머드급 계약이다.
이 계약으로 러시아는 바이칼호 인근의 시베리아 치얀다 가스전에서 생산된 천연가스를 2천㎞ 이상의 가스관인 '시베리아의 힘'을 통해 중국에 공급한다.
이 가스관은 2019년 12월 완공돼 운영되기 시작했다. 연간 공급량은 50억㎥에서 시작돼 2025년 최종 목표인 380억㎥까지 점진적으로 확대될 예정으로 작년에는 이 가스관을 통해 중국에 105억㎥의 천연가스가 공급됐다.
종합하면, 두 차례에 걸친 초대형 장기 계약을 통해 러시아가 중국에 공급하는 천연가스는 수년 안에 연간 최대 480억㎥에 달할 예정이다. 이는 중국이 2021년 수입한 천연가스 총량인 2천53억㎥의 거의 4분의 1에 달하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중러 에너지 밀월'의 전략적 함의가 작지 않다.
게다가 러시아는 유럽 수출을 주력으로 하던 서부의 야말 가스전에서부터 중국까지 이어지는 연간 500억㎥ 송출 용량의 '시베리아의 힘 2' 가스관을 추가로 건설하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이 프로젝트까지 현실이 된다면 중국은 러시아와 잇는 가스관을 통해서만 천연가스 수요의 절반을 충당할 수 있게 된다.
중국으로서는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더 많이 수입하면 신냉전 속에서 관계가 불편한 호주와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구매를 줄일 수 있어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 현재 중국은 가스관을 통한 직도입보다 LNG 운반선을 통해 천연가스 수입을 더 많이 하는데 LNG 운반선을 통한 1∼2위 수입국이 호주와 미국이다.
이번에 새로 체결된 원유 장기 공급 계약도 중러 간 원유 협력 수준을 한층 제고할 전망이다.
10년 전만 해도 러시아의 최대 원유 수출국은 유럽의 네덜란드였지만 현재는 중국으로 대체됐다. 중국은 작년 5억1천여만t의 원유를 수입했는데 사우디아라비아(8천758만t·17.1%) 다음으로 러시아(7천966만t·15.5%)에서 도입한 물량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매년 1천만t(10년간 1억t 계약의 10분의 1)의 러시아 원유 수입이 더해진다면 러시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중국의 최대 원유 수입국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 러시아 편 계속 서는 게 과연 이익일까…중국도 고민
중국은 러시아 등과의 에너지 대량 장기 계약이 국제적 수급 불안 속에서도 자국 경제 안정을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롄웨이량 중국 국가발전개혁위 부주임(차관)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중국은 원유와 천연가스 수입처를 다원화하고 있고 장기 계약 비중이 높아 관련 당사자들이 계약을 잘 이행하기만 한다면 수입이 전체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중국이 단기적 실익이나 장기 전략 측면에서 국제시장에서 외면받는 러시아산 원유를 마다할 이유가 별로 없는 듯도 하지만 실제 중국 역시 러시아산 원유 구매가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단 러시아 일부 금융기관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배제 등 제재가 시장의 예상보다 다양한 곳에서 효력을 미치고 있는 가운데 중국 기관들이 러시아와 원유와 천연가스 거래를 계속하려고 해도 거래와 운송 절차에서 서방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각종 실무적 어려움에 부닥칠 수 있다.
원자재 정보 업체 케이플러에 따르면 중국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은 지난 2월 75만7천 배럴로 1월의 95만4천 배럴보다 줄었는데 일각에서는 이런 변화에 기존 서방의 대러 제재에 따른 거래 위축 효과가 반영됐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실무적 어려움보다 더욱 중국에 큰 부담이 되는 것은 미국에 '대러 제재 훼방꾼'으로 인식되면서 미국과의 대결 구도가 더욱 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반미'를 연대로 러시아를 측면 지원하면서 경제적 실리도 챙길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와 한편에 서는 것이 중국에 심각한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에서도 이미 경고음이 나왔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 국무부 관리는 "만약 중국이나 기타 국가가 우리 제재에 해당하는 활동에 연루되려 할 경우 그들 또한 우리 제재 대상에 오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톰슨 로이터의 에너지 분야 칼럼니스트인 클라이드 러셀은 7일 칼럼에서 "국제 유가 급등으로 베이징이 행복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며 "물류 측면에서나 정치적 측면에서나 (러시아산 에너지 구매가) 힘든 일이 되었기 때문에 중국이 러시아에서 계속 살 것인지가 핵심 질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ch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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