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추수감사절이 불편한 미국 원주민…매년 애도 집회
1970년부터 국가 애도의 날 행사…종족 말살·차별 기억 목적
(워싱턴=연합뉴스) 류지복 특파원 = 미국에서 매년 11월 넷째 주 목요일은 추수감사절이다.
1620년 영국에서 출항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에 도착한 유럽인들이 온갖 고난 끝에 원주민의 도움으로 1년 뒤 첫 수확물을 거둔 뒤 이를 기념한 데서 유래했다. 올해는 지난 25일(현지시간)이었다.
1789년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이날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크리스마스와 함께 흩어진 가족이 모여 정담을 나누는 미국 최대 명절로 불리고, 가장 큰 폭의 세일이 시작되는 '블랙 프라이데이' 바로 전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날은 '국가 애도의 날'이기도 하다. 유럽인에게 터전을 빼앗긴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손이 종족 말살과 약탈의 아픔을 기억하고 지금까지 계속되는 인종차별과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기 위해 만든 날이다.
원주민이 주도한 국가 애도의 날 행사는 1970년 처음 시작됐다.
CNN방송에 따르면 이 해에 미국에선 메이플라워호의 미국 상륙 3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주최 측은 원주민 왐파노아그 부족의 존경받는 활동가인 왐수타 프랭크 제임스에게 연설문을 미리 보여주는 조건을 달아 연설을 부탁했다.
그러나 사전에 입수한 연설문을 본 주최 측은 경악했다. 제임스의 연설문엔 이 행사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백인의 출현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평가와 함께 유럽인의 원주민 학살, 노예화 등 참상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주최 측은 연설이 너무 선동적이라면서 연설문을 대신 써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제임스는 이를 거절하고 다른 원주민 부족과 합세해 애도의 날 집회를 시작했고, 이때부터 메이플라워호가 도착한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서 매년 추수감사절에 맞춰 이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행사 참여자들은 낮 12시에 플리머스의 콜스힐에 모여 일종의 의식을 치르고 현실의 부조리에 항의하는 집회를 가진 뒤 시내로 행진한다.
이 집회는 첫해 150~200명가량이 모였는데, 지금은 10배 규모로 늘었다. 라이브 스트림으로 전세계에도 이 행사를 알리고 있다.
국가 애도의 날은 원주민 입장에서 백인의 만행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아메리카 대륙 정복자인 이들 중심의 역사관에 대한 문제 제기인 셈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또 있다. 미국에서 매년 10월 두 번째 월요일은 국경일인 '콜럼버스 데이'다. 1492년 10월 12일 이탈리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나 콜럼버스 데이 기념은 서양의 북미 지역 식민지화, 원주민 학살 등을 정당화한 것이라는 비판론 속에 원주민의 날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된다.
실제로 1992년 캘리포니아주 버클리가 콜럼버스 데이에 맞춰 원주민의 날을 제정했고, 이후 미국의 다른 도시와 주에서도 같은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조 바이든 대통령은 올해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원주민의 날'을 기념하는 포고문을 냈다. 물론 미 대통령이 매년 내던 콜럼버스 데이 포고문과 함께였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은 뎁 할랜드 연방 하원 의원을 내무장관으로 발탁했다. 내무장관은 미국 내 600여개 원주민 부족에 대한 사무를 관장하지만, 이 자리를 원주민이 맡은 것은 245년 내무부 역사 중 처음이었다.
jbryoo@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