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총수는 정치적 발언 안 한다?…금기 깨는 정용진
논란에도 연일 '공산당 싫다' SNS 글…배경 해석 분분
이건희·김우중도 '정치 설화' 후폭풍…"표현 신중해야"
(서울=연합뉴스) 정열 기자 =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발언이 화제를 모으면서 그가 정치적 발언을 터부시해온 재벌가의 불문율을 깬 배경에도 관심이 쏠린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부터 정권의 '재벌 손보기'가 일종의 관행처럼 이어진 한국적 풍토 탓에 국내 재벌 총수들 사이에서는 정치적 발언을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가 암묵적으로 형성됐고 이 때문에 정 부회장의 발언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재계 안팎에서는 과거 정치권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큰 곤욕을 치렀던 재벌들의 잔혹사를 모를 리 없는 정 부회장이 과감한 소신 발언을 한 것은 그의 독특한 성향과 함께 정권 말기라는 특수한 상황도 작용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있다.
◇ 소신인가 치기인가…"의사표현의 자유 있지만 신중해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정 부회장의 '공산당' 발언 논란은 이달 15일 시작됐다.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빨간색 카드 지갑과 잭슨 피자 박스를 들고 있는 사진을 올리며 "뭔가 공산당 같은 느낌인데 ㅠㅠ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란 문구와 함께 '난 공산당이 싫어요'란 해시태그를 붙였다.
일부 매체가 이를 기사화하며 논란을 빚자 같은달 17일 "반공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중략) 난 콩 상당히 싫다"라는 글을 또 올렸다.
중국 내 반감과 함께 주주나 소비자 피해가 우려된다는 지적에도 "이것조차도 불편러(매사 불편함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현실이 개탄스럽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24일에는 '北, 오징어게임 들여온 주민 총살…구입한 학생은 무기징역'이란 제목의 신문 기사 사진을 올리며 재차 "공산당이 싫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신세계그룹 내에서 면세점 사업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중국인들이 면세점의 '큰손'이란 점을 감안하면 정 부회장의 이런 발언이 사업적으로도 적절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중국 소비자들이 정 부회장의 발언을 문제 삼아 불매운동이라도 벌일 경우 신세계그룹뿐 아니라 주주들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연인지 몰라도 정 부회장이 공산당 관련 글을 올린 직후인 이달 16일부터 19일까지 4거래일 연속 이마트 주가가 하락했다.
한국유통학회장인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는 26일 "개인적 성향이나 의사표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정 부회장의 경우 과거보다는 훨씬 책임이 큰 자리로 올라갔기 때문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표현은 좀 더 신중하게 하는 게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
한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황교익 씨가 부자는 치킨을 안 먹는다, 음식에 계급이 있다고 하는데 댓글 부탁한다"고 한 질문에 정 부회장이 "가세연 보세요"란 답글을 단 것도 논란을 빚었다.
가로세로연구소(가세연)가 보수 성향 유튜브 채널이라 정 부회장이 은연중에 정치 성향을 드러냈다는 말이 나왔다.
정 부회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재벌 총수들은 사회적 시선이나 부작용 등을 우려해 SNS 계정을 운영하지 않는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드물게 인스타그램 활동을 하지만 정치적 성향의 글은 거의 올리지 않는다.
최 회장이 최근 화천대유 관련 의혹을 일축하는 듯한 표현으로 눈길을 끌었던 글도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이 아무리 현란해 보여도 낙엽처럼 얼마 못 가 사라지는 게 자연의 이치죠"라는 은유적 표현이었다.
재계 일각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진보와 보수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주요 대기업의 사실상 총수인 정 부회장이 굳이 특정 정치 성향을 드러내 오해의 소지를 만드는 것이 신중하지 못한 처신이란 반응을 보였다.
한 재계 관계자는 "정 부회장이 정권 초기라면 그런 말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정권 말기이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보수 성향 후보가 유리한 상황이라 과감하게 속내 발언을 하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 부회장은 과거에도 SNS에서 한 발언이 문제가 됐던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며 "최고경영자의 말 한마디가 자칫 기업의 존폐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초연결 사회가 됐기 때문에 언어 선택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이건희·김우중도…후폭풍 컸던 재벌 '정치 설화'
재벌 총수의 소신 발언은 들을 때는 시원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후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이른바 '베이징 발언'이다.
이 회장은 1995년 4월 출장차 방문했던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주요 언론사 특파원들과 오찬 간담회를 한 자리에서 당시 김영삼 정부의 경제정책 난맥상과 관료주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우리나라의 정치력은 4류, 행정력은 3류, 기업능력은 2류"라고 말했다.
며칠 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청와대 간담회에서 해당 발언을 놓고 "이건희 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 회장은 이듬해 터진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검찰 수사와 재판을 받는 등 YS 임기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 회장은 이 설화 사건 이후로 언론을 극도로 기피하는 성향을 갖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고 김우중 대우 회장은 김대중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김 회장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시절인 1998년 1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 참석했다가 당시 김 당선자의 최측근으로 꼽히던 유종근 경제고문과 가시 돋친 설전을 벌였다.
김 회장은 유 고문에게 "최근 위기가 금융부실에서 비롯된 것인데 재벌 등 대기업들만 몰아붙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핵심 정책으로 추진하던 재벌개혁과 기업 간 사업교환(빅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김 회장은 이후 차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으로 내정된 뒤에도 "재벌해체론은 선진국이 국내시장 잠식과 경쟁상대인 우리 대기업의 제거를 위해 내세우는 논리"라며 김대중 정부의 재벌 정책을 정면 비판했다.
대우그룹은 결국 41조원 규모의 분식회계와 불법대출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나면서 김 회장 등 핵심 경영진은 사법처리되고 그룹은 공중분해 됐다.
김 회장의 사법처리와 대우그룹 해체는 범법행위가 직접적 원인이었지만 취임 초부터 사사건건 정부에 맞섰던 김 회장에 대한 '괘씸죄'가 숨은 배경이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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