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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 대표 온건파서 30년만에 총리 배출…강경파에 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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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 대표 온건파서 30년만에 총리 배출…강경파에 포위
한일 위안부 합의 주도 '비둘기파'…정치색 드러낼지 주목

(도쿄=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4일 100대 일본 총리로 취임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는 2015년 당시 일본 외무상으로 한국과 위안부 합의를 주도한 자민당 내 온건파로 분류된다.
'비둘기파'로 평가되는 자민당 내 명문 파벌인 '고치카이'(宏池會, 일명 기시다파)의 수장으로, 이 파벌에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총리 재임 1991년 11월~1993년 8월) 이후 30년 만에 총리가 배출됐다.
30년 전에는 고차키이로 대표되는 온건 보수가 주류였지만, 지금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실질적으로 이끄는 호소다(細田)파로 대표되는 강경 보수가 주류 세력이 됐다.
강경파에 둘러싸인 기시다 총리가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 "미국서 겪은 인종차별 계기 정치인 꿈 품어"
1957년 도쿄도(東京都) 시부야(澁谷)구에서 태어난 기시다는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 관료였던 아버지의 미국 부임으로 초등학교 1~3학년을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다녔다.
당시 같은 반 학생들과 동물원에 갔을 때 선생님이 옆에 있는 친구와 손을 잡으라고 했는데, 기시다 옆에 있던 백인 여학생이 싫은 기색을 보이며 기시다가 내민 손을 잡지 않았다고 한다.
기시다는 1960년대 미국에서 경험한 인종차별을 계기로 "이런 부조리를 없애고 싶다. 정치를 통해 바로 잡아야 한다"며 정치인을 꿈을 품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기시다는 1982년 일본의 사립 명문 와세다(早稻田)대학 졸업 후 일본장기신용은행에 입사해 약 5년 동안 근무했다.
1987년 공무원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아버지 기시다 후미타케(岸田文武) 중의원의 비서가 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1992년 부친이 사망하고 이듬해인 1993년 여름 히로시마(廣島) 제1구에 자민당 후보로 출마해 처음으로 중의원에 당선됐다.
할아버지도 중의원을 지낸 기시다는 3대 세습 정치인이다.

◇ 아베 설득하며 한일 위안부 합의 성사시켜
기시다는 1999년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1937∼2000) 내각에서 건설성(현 국토교통성) 정무차관,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에서 문부과학성 부대신으로 기용됐다.
이후 1차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때인 2007년 내각부특명대신(오키나와·북방·국민생활·과학기술·규제개혁 담당상)으로 임명돼 처음 입각했다.
2012년 12월 2차 아베 정권 출범과 함께 외무상에 발탁돼 약 4년 8개월 재직했다.
기시다는 태평양전쟁 후 일본 외무상 연속 재임 일수 1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
외무상 재임 중이던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의 일본 측 당사자가 된다.
아베 당시 총리는 자신의 지지 기반인 보수층의 반발을 우려해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취지의 위안부 합의에 신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시다는 이런 아베를 설득해가면서 위안부 합의를 성사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기시다는 2차 아베 정권 때 외무상, 방위상,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됐지만, 작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전 총리에 이어 2위에 머물러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다시 도전해 지난달 29일 총재에 당선됐고, 이날 임시국회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이루지 못한 총리 자리에 올랐다.

◇ 자민당 주류, 온건 보수에서 강경 보수로
기시다는 뼛속부터 우파인 아베와는 이념적 성향이 다른 것으로 평가된다.
그가 수장으로 있는 자민당 내 주요 파벌인 고치카이는 자민당 내 '리버럴'(자유주의)로 평가되며,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중시해왔다.
고치카이에서 총리가 배출된 것은 설립자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1899∼1965) 전 총리 이후 이번이 5번째다.
고치카이는 1960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4명의 총리를 배출하며 명문 파벌로 성장했다.
고치카이 출신의 4번째 총리인 미야자와 재임 기간(1991.11.5~1993.8.9)에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내용이 담긴 '고노 담화'가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30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자민당의 주류는 온건 보수에서 강경 보수로 교체됐다.
고치카이(46명·이하 소속 국회의원 수)는 자민당 내 5위 파벌이고, 최대 파벌은 아베 전 총리가 실질적인 지주인 호소다파(96명)다.
2위 파벌은 아베의 정치적 맹우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자민당 부총재가 수장인 아소파(53명)이고, 3위 파벌은 한국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외무상이 실질적인 수장인 다케시타(竹下)파(51명)다.
기시다는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고치카이는 물론 호소다파와 아소파, 다케시타파의 고른 지지로 총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자민당 간부 및 각료 인사에서도 자신을 지지해준 주요 파벌에 자리를 배분했다.


◇ 주류 눈치보기 언제까지…중·참의원 승리 뒤 독자노선?
기시다는 2차 아베 정권 때 요직을 거치면서 자민당 주류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기시다는 2015년 10월 파벌 모임에서 "고치카이는 헌법에 애책이 있다. 당분간 헌법 9조(전쟁 포기 등 규정) 자체는 개정할 생각이 없다"며 "이것이 우리의 입장이 아닐까 싶다"(일본 잡지 'THEMIS' 2015년 12월 호)고 말했다.
그의 발언이 보도되고 당시 개헌을 추진하던 아베 총리가 격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시다는 "헌법은 중요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태도를 바꿨다고 한다.
기시다는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 기간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강한 반발을 초래할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 대해 "시기와 상황을 고려한 후 참배를 생각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민당 내 강경 보수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 모호하게 발언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기시다는 찬반이 명확히 갈리는 사안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을 때가 있어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도 받는다.
일본의 소장파 정치학자인 나카지마 다케시(中島岳志) 도쿄공업대 교수는 저서인 '자민당'(한국어 번역서 '일본의 내일' 작년 8월 출판)에서 기시다에 대해 "비둘기파로 불리는 고치카이의 에이스라는 자유주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구체적인 정치 제언에 반영되지 않았기에 그가 정말 그런 성향을 지녔는지 확실치 않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일본 정치에 정통한 이헌모 일본 중앙학원대학 법학부 교수는 기시다가 당분간 자민당 내 주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이달 말로 예상되는 중의원 선거와 내년 7월 참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어 권력이 공고해지면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hoju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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