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시선] '재일동포 피땀' 민단 민주주의가 무너진다
단장 선거 파행에 항의해 소집 요구한 임시 중앙대회도 무산
정부 예산 매년 80억원 지원하는데 동포재단·공관 손 놓아
(도쿄=연합뉴스) 김호준 특파원 = '재일동포의 피와 땀, 눈물의 결정체'이자 75년 동안 재일동포 사회의 대표 조직 역할을 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의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
올해 4월 여건이 민단 중앙본부 단장이 사상 초유로 무(無)개표 당선된 것이 발단이었다.
이에 항의하는 민단 지역조직들이 '민단중앙정상화위원회'(이하 정상화위)를 결성해 여 단장에 대한 신임을 묻는 임시 중앙대회 소집을 요구했지만, 석연치 않은 소집 요구자 본인 확인 과정 끝에 무산됐다.
◇ 여건이 단장, 사상 초유의 무개표 당선이 발단
여 단장은 지난 4월 6일 제55회 민단 중앙대회에서 경쟁 후보인 임태수 전 민단 부단장의 후보 자격이 박탈되면서 투표함을 열지 않은 상태로 3년 임기 단장으로 재선됐다.
당시 민단 단장에 도전한 후보는 현직 여 단장과 임 전 부단장 2명뿐이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임 전 부단장의 과거 범죄 이력을 문제 삼아 후보 자격을 박탈했다. 자격 박탈의 근거가 되는 명확한 민단 규정이 없는데도 여 단장의 유일한 경쟁 후보를 탈락시켜 심각한 내부 갈등이 초래됐다.
게다가 임 전 부단장의 후보 자격 박탈과 여 단장의 무개표 당선이 선언된 중앙대회에는 약 10명밖에 참석하지 않았고, 대회장의 문이 잠긴 가운데 약 10분 만에 끝났다.
중앙대회 다음 날인 4월 7일 민단 중앙위원·대의원(491명), 그리고 선거인(853명)이 투표한 1천344명분의 투표용지는 문서 세절기로 파기됐다. 개표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 임시중앙대회 소집요구 서명…"집행부 조직적 철회 압박"
이에 민단 지방본부들을 주축으로 정상화위가 결성돼 선거 파행에 항의하며 임시 중앙대회 개최를 요구하고 나섰다.
민단 규약 제13조에 따르면 대의원과 중앙위원 과반의 요구가 있으면 의장은 30일 이내에 임시 중앙대회를 소집해야 한다.
정상화위는 서명 운동에 돌입해 대의원과 중앙위원 308명(과반 262명)의 서명을 받아 6월 24일 서명자 명부를 박안순 민단 중앙 의장에게 제출했다.
이 중 23명분은 서류 미비 등을 이유로 무효가 됐고, 285명분만 유효한 서명으로 인정받았다.
나아가 박 의장은 본인 확인 절차가 필요하다면서 서명자에게 통지문을 보내 서명 확인서를 우편으로 반송하도록 했다.
이 통지문에는 "서명을 했어도 그 후에 생각이 바뀐 경우 반송할 필요가 없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정상화위에 따르면 서명자 명부는 민단 중앙 집행부로 유출됐고, 서명한 대의원과 중앙위원을 상대로 서명 확인서를 반송하지 말라거나 이미 반송했어도 취소 문서를 내라는 등의 '조직적 압박'이 가해졌다.
서명에 참여한 복수의 민단 대의원과 중앙위원은 연합뉴스에 민단 중앙 간부 혹은 민단 중앙에 동조하는 지역본부의 고문으로부터 서명을 철회하라는 취지의 전화를 받았다고 확인했다.
정상화위는 본인 확인 과정에서 민단 중앙 집행부가 '부당한 방해 행위'를 했다면서 지난달 15일 서명 확인 작업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아울러 김춘식 민단 감찰위원장에게 방해 행위자에 대한 엄중한 처분을 요구했다.
그러나 박 의장은 같은 달 19일 정상화위를 배제한 가운데 확인 작업을 강행해 서명 확인서를 반송한 대의원과 중앙위원이 241명으로 과반에 이르지 못해 임시 중앙대회 개최 요구는 무효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울러 이번과 같은 취지로 임시 중앙대회 개최를 재차 요구하는 것은 '일사부재의' 원칙에 따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여건이 단장은 정상화위는 결성 목적이 다했기 때문에 신속하게 해산할 것을 권고한다고 통지했다.
◇ "모두 민단 규약에 근거 없다…자기 편한대로 규칙 정해"
이와 관련 박상홍 전 민단중앙본부 사무부총장은 "임 전 부단장의 후보 자격 박탈과 임시 중앙대회 요구 서명자 본인 확인, 임시 중앙대회 개최 요구의 일사부재의 원칙, 정상화위 해산 권고 등은 모두 민단 규약에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박 전 사무부총장은 "양측이 시합하는데 심판은 없고 한쪽이 자기 편한대로 규칙을 정하는 상황"이라고 한탄했다.
그는 여 전 단장의 무개표 재선 과정에 문제를 제기했다가 25년 동안 근무했던 민단중앙본부를 떠나야 했다.
한편, 여 단장은 19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민단 중앙 집행부가 조직적으로 서명 철회를 압박했다는 정상화위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그는 민단 지방본부 단장에 이끌려 서명하거나 인간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한 사람이 철회한 경우는 있을 것이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 재외동포재단도 현지 공관도 나몰라라
올해 단장 선거를 계기로 불거진 민단의 내부 갈등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민단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0월에 결성돼 곧 창립 75주년을 맞는다.
해방 후 일본에 남은 동포들이 온갖 차별 속에서도 피와 땀, 눈물로 지켜온 조직이 바로 민단이다. 지금도 약 30만명의 재일동포가 소속된 대표 단체다.
이런 단체이기에 대한민국 정부는 매년 약 80억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민단 내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내부 갈등이 곪아 터지는 상황에서도 예산을 집행하는 재외동포재단이나 현지 공관은 민간 동포단체의 일이라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hoj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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