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치적 혼란이나 '하나의 중국' 분쟁때 대사 소환"
홍콩매체 "대사 소환 역사, 마오쩌둥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홍콩=연합뉴스) 윤고은 특파원 = 중국이 대만 문제를 놓고 발트해 국가 리투아니아와 갈등하며 현지 주재 대사를 소환한 가운데, 이 같은 중국의 자국 대사 소환 역사는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12일 보도했다.
SCMP는 중국의 자국 대사 소환 역사를 다섯 시기로 분류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1960년대는 중국 내 정치적 혼란이 이유였고, 이후에는 대만과 '하나의 중국' 원칙을 놓고 분쟁이 벌어졌을 때 대사 소환이 이뤄졌다고 전했다.
◇ 1966년 인도네시아 주재 중국 대사 소환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이 쿠데타를 기도하자 인도네시아는 중국을 배후로 지목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됐다.
중국은 배후설을 부인하며 1966년 4월 현지 자국 대사를 소환했고, 이듬해 양국은 단교했다.
1965~1966년 인도네시아에서는 공산당원과 동조 세력을 겨냥한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고, 현지 거주 중국인들도 목숨을 잃었다.
양국은 단교 23년만인 1990년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 1966~1976년 문화대혁명기 모든 대사 소환
1966년 마오쩌둥 전 주석이 구습과 외국자본의 영향 타파를 내걸고 문화대혁명을 시작하면서 중국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됐다.
당시 중국은 41개국에 외교 사절단을 뒀지만 문화대혁명 시작과 함께 그들의 활동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집트 주재 대사만 1967년 봄까지 남아있었을 뿐 문화대혁명 기간 모든 중국 대사가 소환됐다.
◇ 1981년 네덜란드 주재 중국 대사 소환
1981년 중국은 네덜란드가 현지 회사의 대만에 대한 잠수함 판매를 승인한 것에 반발해 현지 대사를 소환하고, 네덜란드에도 중국 주재 대사를 불러들이라고 요구했다.
양국은 상호 대사가 없는 상태를 3년간 이어가다 1984년 관계를 정상화했다.
◇ 1989년 '톈안먼 탄압' 이후 모든 대사 소환
중국은 1989년 6월 4일 톈안먼 민주화시위 탄압 이후 총회를 위해 모든 대사를 소환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톈안먼 사태와의 관련성을 부인하며 '예정된 휴가', '연례 본국 방문' 등의 이유를 댔다.
당시 서방 외교관들은 중국이 외교관의 추가 망명을 방지하기 위해 대사들을 소환했다고 밝혔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톈안먼 민주화시위 이후 20명 이상의 중국 외교관이 망명했다.
◇ 1995년 대만 총통 방미 허용에 주미 대사 소환
중국은 1995년 6월 미국이 리덩후이(李登輝) 대만 총통의 방미를 허용하자 미국 주재 자국 대사를 불러들였다.
리 총통은 1979년 미국이 중국과 수교를 위해 대만과의 외교관계를 철회한 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대만 총통이었다.
다만 리 총통의 방미는 미국 정부의 초청이 아닌, 개인적으로 모교인 코넬대를 방문하는 형식이었다.
중국은 그의 방미를 두고 대만독립을 꾀하기 위해 위장된 술책이라며 미국이 "불장난을 한다"고 비난했다.
중국은 미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한다고 약속한 후 주미 대사를 다시 미국으로 보냈다. 본국 소환 두달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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