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미 정치권에 소환된 학문 '비판적 인종이론'
구조적 인종차별 주목한 이론…작년 흑인시위서 촉발되고 트럼프가 확산
내년 중간선거 앞두고 공화당 쟁점화…민주당은 경계심
(워싱턴=연합뉴스) 류지복 특파원 = 최근 미국 언론의 정치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비판적 인종이론'(Critical Race Theory·CRT)이다.
이 용어는 1년 전만 해도 많은 미국인이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갑자기 모든 곳에 퍼졌다고 뉴욕타임스가 평가할 정도다.
CRT는 70~80년대 킴벌리 윌리엄스 크렌쇼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법학 교수 등이 발전시킨 이론으로, 미국 내 인종 차별은 개인이 아니라 백인이 주도해온 사회 시스템과 법률 차원의 구조적 문제임을 강조한다.
40년 넘은 CRT가 대중에 회자된 계기는 지난해 경찰이 무릎으로 목을 눌러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미 전역의 인종차별 항의시위로 번졌고 미국의 구조적 인종차별에 관한 담론이 형성되면서 CRT가 종종 언급됐다.
학문 성격이 강했던 CRT를 정치 공방의 장에 올린 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트럼프는 작년 6월 "분열적이고 반미국적인 교육을 해선 안 된다"며 연방 기구의 인종차별 금지 훈련 프로그램에서 CRT 등이 들어간 내용을 빼도록 지시했다.
작년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인종차별 항의시위로 궁지에 몰리자 CRT에 부정적인 백인 지지층을 규합하려는 정치적 결정이었다는 해석이 나왔다.
비록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이 지시를 철회했지만, 정치권에서는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겨냥한 CRT 공방전이 여전하다.
보수 성향인 조지아주와 플로리다주의 교육위원회는 지난 6월 공립학교에서 CRT 교육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리틀 트럼프'로 불리는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CRT 교육에 대해 "서로 미워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 "국가가 허가한 인종차별주의"라고 비난했다.
공화당이 CRT를 공격 소재로 다루는 것은 득표전에서 불리할 게 없다는 인식이 작용했다는 평가다.
CRT가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백인에게 떠넘기며 반(反)백인 정서를 부추긴다는 주장이 백인 표심 확보에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흑인 표심을 잃겠지만 백인의 더 많은 지지를 받아 이익이 남는 장사라는 게 공화당의 판단인 셈이다.
작년 11월 대선 때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흑인 유권자는 87%가 바이든 대통령을 찍었을 정도로 민주당 지지가 압도적이다. 문제는 흑인 유권자 비중이 13%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반면 백인 유권자 중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57%의 득표율로 바이든 대통령(42%)을 앞섰다. 미국에서 백인 비중은 60%다.
최근 선거 때마다 대도시와 시골의 중간지대인 교외지역의 백인이 선거 승패를 좌우하는 표심임이 확인됐음을 감안하면 공화당 입장에서 CRT 공격은 밑지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민주당과 공화당의 상원 의석이 동수이고 435석의 하원은 민주당이 8석의 불안한 우위여서 내년 중간선거 때 의회 권력 탈환을 노리는 공화당으로선 CRT가 승부처인 교외지역 백인층 공략을 위해 유효한 수단이다.
공화당 전략가인 포드 오코넬은 정치전문매체 더힐에 CRT 이슈는 공화당이 교외지역을 되찾는 일을 도울 수 있다며 특히 하원 다수당을 위한 '레드 웨이브'(공화당 지지 물결)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에서도 위기감이 감지된다. 민주당 그레고리 믹스 하원 의원은 CRT가 전선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고, 한 민주당 운동원은 CRT에 관한 담론을 피할 필요는 없지만 정치연설의 일부가 돼선 안 된다고 경계심을 보였다.
정치분석가인 J. T. 영은 "CRT가 민주당에 위험한 분열적 정치 쟁점"이라며 CRT가 흑인에 초점을 둠으로써 백인은 물론 히스패닉, 아시안 등 다른 비백인 유색인종까지 소외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CRT 논쟁은 인종 차별과 갈등이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정치권은 여기에 더해 이를 득표전에 활용하는 미국 사회의 한 단면이다.
jbry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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