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법원, 아베 거부 '히로시마 원폭피해자 범위 확대' 인정 판결
국가지정 피해지역 외 거주 '검은비' 소송 원고들 2심서도 승소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태평양전쟁 말기에 미국의 히로시마(廣島) 원폭 공격으로 생긴 피해자에 대한 원호 범위를 놓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싸워온 원고 측이 2심에서도 승소했다.
이번 2심 판결은 1심에서 졌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내각의 일본 정부가 국내의 비판론을 무시하고 항소했던 사안으로, 아베 전 총리의 결정이 잘못됐음을 2심 재판부가 인정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히로시마고등재판소(고등법원)는 14일 미군의 1945년 원폭 투하 당시 국가가 지정한 원호 대상 지역이 아닌 곳에 있다가 피폭당한 84명이 히로시마현과 히로시마시를 상대로 제기한 피폭자 건강수첩 교부 불허 처분 취소 청구 관련 항소심에서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여 국가 측 항소를 기각했다.
2심 재판부는 피폭자원호법에 따른 피해자 인정 요건에 대해 "방사능에 의한 건강피해가 부정될 수 없는 점을 입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며 원고들이 원호 대상 피폭자에 해당한다는 1심 판단을 유지했다.
이 소송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미국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사상 첫 원폭 공격을 한 것에서 비롯됐다.
일본 정부는 원폭 투하 직후 히로시마기상대의 조사 자료 등을 근거로 1976년 검은 비가 쏟아진 것으로 추정되는 히로시마시 피폭 중심지에서 북서쪽으로 길이 19㎞, 폭 11㎞의 타원형 지역을 '특례구역'으로 지정했다.
특례구역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무료 건강진단 혜택을 주고 특정 질환이 있는 경우 피폭자 건강수첩을 발급해 다양한 원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1995년부터 피폭자원호법을 시행했다.
그러나 특례구역 바깥의 피폭 중심지에서 약 8~29㎞ 지점에 있던 히로시마 주민들이 '검은비' 피해를 실제로 봤는데도 혜택을 보지 못하게 되자 문제를 제기해 히로시마현과 히로시마시가 주민조사를 진행했다.
히로시마현 등은 조사 결과를 근거로 기존 특례지역의 5배 규모인 히로시마시 거의 전역과 주변 지역을 특례구역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결론 짓고 중앙정부에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폭자 건강수첩을 받지 못한 피폭자들은 2015~2018년 잇따라 이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갔고, 작년 7월 29일 소송에 나섰던 84명 전원이 1심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1심 재판부는 국가가 지정한 원호 구역 바깥에도 검은비가 내렸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피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봤다.
피폭자 건강수첩 발급 업무를 담당해 소송에서 피고가 된 히로시마현과 히로시마시는 1심 판결이 나온 뒤 곧바로 항소 포기 방침을 정하고 중앙정부에 승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를 이끌던 아베 전 총리는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정됐던 특례구역을 기준으로 시행한 정책을 뒤집을 과학적·합리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항소를 지시해 2심 재판으로 이어졌지만 결국 국가 측이 패소한 것이다.
국가 측의 항소가 이뤄진 뒤 일본 내에선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피해자 모두가 고령자인 점 등을 들어 일부 언론은 피해자 구제를 뒷전으로 하는 국가 측의 항소가 취하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소송 과정에서 14명이 고령으로 사망했고, 유족이 원고 지위를 이어받아 소송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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