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팔순 파우치 소장이 한국 공무원이었다면
(뉴욕=연합뉴스) 고일환 특파원 =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NIAID) 소장은 대한민국에선 찾기 힘든 스타일의 공무원인 것 같다.
인구 고령화의 영향으로 장관급 이상 정무직 공무원 중 70대 이상 올드보이들의 포진은 많은 나라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얼마 전 팔순 잔치를 한 파우치 소장은 올드보이 중에서도 형님뻘이다.
그가 NIAID 소장으로 임명된 것은 1984년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때 임명된 뒤 36년간 6명의 대통령 밑에서 소장직을 유지했다.
전염병 분야에서 미국 내 최고 권위자라는 점이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그처럼 오랜 기간 임무를 계속하게 된 배경이 됐을 것이다.
그런 파우치 소장도 올해는 어느 때보다 힘든 한 해를 보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인사권자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갈등 때문이다.
백악관 코로나19 태스크포스(TF)에 참여했던 파우치 소장은 트럼프 대통령 앞에서도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쓴소리'를 싫어하는 스타일로 유명하지만, 파우치 소장은 TF 내 '예스맨'들 속에서도 할 말을 다 하고 눈치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태 발생 초기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해 방역 강화에 미온적인 입장이었지만, 파우치 소장은 방역 강화를 주장했다.
게다가 파우치 소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TV 출연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인사의 기준이 '충성심'이었던 트럼프 대통령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의에서 파우치 소장을 '재앙', '멍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친(親)트럼프 음모론 집단인 큐어넌(QAnon)도 파우치 소장 때리기에 힘을 보탰다.
특히 파우치 소장이 정부 내 비밀 권력집단인 '딥스테이트'의 일원이고, 트럼프 대통령의 경제적 업적을 무너뜨리려는 속셈에서 방역 강화를 추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파우치 소장을 경질하지 않았다.
'파우치를 경질하라'(FireFauci)라는 해시태그가 달린 트윗을 리트윗하는 등 실제 경질을 검토하기도 했지만 후폭풍을 우려해 행동으로 옮기진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인들이 코로나19 문제에 대해 대통령보다 파우치 소장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당선인이 최근 파우치 소장을 유임하고, 동시에 대통령 수석보좌관 업무까지 맡긴 것도 이 같은 여론 때문이다.
이로써 파우치 소장은 7명의 대통령과 함께한 고위 공무원이 됐다. 우리나라로 치면 직선제가 처음 실시된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부터 한 자리를 지킨 셈이다.
kom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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