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반정부 집회 한 달…"독재·공포정치·유전무죄 질렸다"
경제난 불만·반정부인사 납치에 '레드불 유전무죄 사건'이 기름 부어
'금기' 왕실 거론 파장 확산…'개헌·의회 해산' 요구에 정부 대응 주목
(방콕=연합뉴스) 김남권 특파원 = 태국 내 반정부 집회의 열기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비상사태 이후 지난달 18일 처음으로 방콕에서 반정부 집회가 재개된 이후 약 한 달간 멈추지 않고 있다.
대학생들이 중심이 돼 캠퍼스 내에서 외치던 목소리는 나이 든 세대와 거리로까지 조금씩 번지는 듯한 양상이다.
태국에서 수 십년간 금기시돼 온 왕실 문제까지 공개 거론되면서 반정부 집회 향배에 국내외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 1천여명→4천여명→1만여명…점점 커지는 반정부 불길
지난달 18일 방콕 시내 민주주의 기념비 근처에서 반정부 집회가 열렸다.
당국이 3월 16일 코로나19 비상사태를 선포한 뒤 처음이었다.
비상사태하에서도 모인 참석자들은 당시 ▲의회 해산 및 새로운 총선 실시 ▲군부 제정 헌법 개정 ▲ 반정부 인사 탄압 중지라는 3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었다.
이후 태국 전역에서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반정부 집회가 이어졌다.
10일 태국 민주화 운동의 중심인 탐마삿 대학의 랑싯 캠퍼스에서 열린 반정부 집회에는 4천명 안팎의 학생 및 시민들이 참여했다.
14일에는 태국 최고 명문인 왕립 쭐라롱껀 대학 학생 1천여명이 학교 측의 집회 금지 방침에도 불구하고 반정부 집회를 열었다.
16일 방콕 시내 민주주의 기념비 앞에서 열린 집회에는 경찰 추산 1만2천명, 집회 측 추산 2만~3만명이 참여해 정부를 비판했다고 방콕포스트는 전했다.
경찰 추산대로라도 1만명 이상이 반정부 집회에 참석한 것은 이례적이다.
외신들도 "수년 사이 최대 반정부 집회 인파"라고 전했다.
◇ 반정부 집회 왜?…경제난·반정부인사 납치·'레드불 유전무죄' 복합적
애초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전 태국에서는 반정부 집회가 확산하는 형국이었다.
지난해 3월 총선에서 군부 재집권 반대, 구시대적 헌법 개정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젊은 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제3당을 차지한 퓨처포워드당(FFP)이 올해 2월 정당법 위반을 이유로 강제해산되면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반정부 집회가 이어졌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로 급속하게 동력을 잃었다.
집권층은 '비상 칙령'을 통해 반정부 집회에 합법적인 재갈을 물릴 수 있었다.
비상사태하에서는 전염병을 옮길 수 있다는 이유로 집회가 금지된다.
이 와중에서 지난달 18일 반정부 집회가 다시 일어난 데에는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많다.
태국은 코로나19 확진자가 3천377명(16일 현재)이고, 지역감염도 70일 이상 발생하지 않는 등 전 세계적으로 방역이 가장 성공적인 국가로 꼽힌다.
그러나 관광 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15%가량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모든 국경을 철저히 걸어 잠그면서 경제는 직격탄을 맞았고, 이로 인한 불만도 적지 않다.
이러던 중 반정부 인사 완찰레암 삿삭싯(37)이 6월 초 도피 중이던 캄보디아에서 괴한들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 발생했다.
2014년 쿠데타 이후 인근 국가로 도피한 반정부 인사 중 최소 8명이 행방불명 됐고, 이 중 일부는 사망한 채 발견되면서 태국 정부의 개입 의혹이 제기됐는데 이번 사건도 연장 선상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여기에다 '레드불 창업주 손자 뺑소니 사망사고'에 대해 검찰이 지난달 불기소를 결정한 것이 반정부 집회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태국 사회 내 고질적인 것으로 평가받는 '유전무죄'를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민심의 공분이 커졌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참석자들의 발언에서도 잘 나타난다.
14일 집회에 참석한 쭐라롱껀대 학생 시린 뭉차론은 온라인 매체 카오솟에 "국민의 목소리는 무시되고 반정부 활동가들은 당국에 의해 탄압받는 독재에 질렸다"면서 "정부는 자본가들만 편들고 나머지 국민은 고통받고 있는 데다 법은 기득권층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도 진저리가 난다"고 말했다.
16일 집회장에 나온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84세 남성은 방콕포스트에 "내 세대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 실패했다"며 "정말로 변화를 보고 싶다. 부당함과 고장 난 민주주의는 참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탐마삿대 학생 나린 이사리야싯(20)은 AP통신에 "태국은 여전히 완전한 민주주의가 없다"면서 "독재가 반복되고 있다. 악순환을 끊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고 말했다.
◇ '금기' 왕실을 건드리다…'거리 두기' 움직임도
최근 반정부 집회에서는 금기로 여겨지던 왕실을 공개적으로 거론했다는 점에서 파장이 커졌다.
10일 탐마삿대 집회 말미에 일부 학생이 10개 항으로 된 왕실 개혁을 촉구했다. 친왕실 인사들은 사법 당국의 수사를 촉구하는 등 강력하게 반발했다.
태국에서 왕실 권위는 어느 입헌군주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 왕가에 대한 부정적 묘사 등은 왕실 모독죄로 최고 1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왕실에 대한 언급은 태국 내에서 금기시돼 왔다.
태국 언론을 통해서도 10개 항의 왕실 개혁안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자칫 왕실 모독죄로 처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진영 교수 및 학자 100여명이 학생들의 왕실 개혁 요구는 정당한 것이라고 옹호하고 나섰지만, 왕실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정부 당국에 탄압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쁘라윳 짠오차 총리는 이미 "너무 나갔다"고 언급했다.
친왕실 인사들은 '왕실 모독' 이유로 1973년 탐마삿대 캠퍼스에서 발생한 유혈 사태의 재현 가능성을 거론하는 경고성 발언도 나왔다.
이러자 민주진영 내부에서도 선을 넘는 요구는 친왕실파와의 충돌을 불러와 1973년 유혈 사태와 유사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가 나왔다.
이를 고려한 듯 16일 집회를 주최한 '자유 국민운동'은 정부에 대한 요구사항에 기존의 3개 항 외에 왕실 개혁 요구는 포함하지 않았다고 방콕포스트는 전했다.
◇ 태국 정부 대응 주목…"어떤 일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
16일 집회 주최 측은 9월까지 정부가 자신들의 요구에 대해 조처를 하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열겠다고 공언했다.
일단 정부도 유화 제스쳐를 취하는 모양새다.
쁘라윳 총리 측은 반정부 집회 주최 측 인사들과 대화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군부 정권 당시 통과된 헌법이나 이 헌법에 따라 군부가 지명한 상원의원 250명은 모두 현 정부의 핵심 권력 기반인 만큼, 이를 개정하거나 없애라는 반정부파의 주장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여기에 한숨을 고른 모양새긴 하지만, '화약고'와 같은 왕실 개혁 주장이 다시 반정부 집회에서 거론된다면 파문이 어디로 튈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영국 BBC 방송은 이와 관련 "이런 상황은 태국이 가보지 못한 영역"이라면서 "이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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