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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따블라디] 독립군 주요 무기 공급처 '체코군단'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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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따블라디] 독립군 주요 무기 공급처 '체코군단'을 아시나요?
봉오동·청산리 전투 승리의 '밀알'…총·폭탄 등 핵심 무기류 판매
체코군단, 시베리아 열차로 극동 이동…블라디 공동묘지 기념비 있어

[※ 편집자 주 : '에따블라디'(Это Влади/Это Владивосток)는 러시아어로 '이것이 블라디(블라디보스토크)'라는 뜻으로, 블라디보스토크 특파원이 러시아 극동의 자연과 역사,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생생한 소식을 전하는 연재코너 이름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김형우 특파원 = 러시아 연해주(州)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에서 약 6㎞ 떨어진 마르스코예(해상) 공동묘지에는 외국 군인들을 위한 기념비와 묘지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우리 독립군(軍)의 항일투쟁 가운데 가장 위대한 순간으로 손꼽히는 봉오동(1920년 6월 6∼7일)과 청산리(1920년 10월 21∼26일) 전투의 숨은 조력자로 알려진 체코군단 소속의 군인들이 묻혀있다.
체코군단은 두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일본군을 잇달아 격파하며 전 세계에 우리 민족의 기개를 보여준 독립군의 주요한 무기 공급처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받으며 최근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체코군단 소속 병사들이 숨진 뒤 안장된 공동묘지를 지난 2일 기자가 찾았다.
묘지에 들어서자 거대한 석조 기념비가 눈에 띄었다.
기념비에는 '1918'이라는 숫자와 함께 체코어와 러시아어로 적힌 '숨진 체코-슬로바키아인들에게 영원한 기억을'이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웅장한 기념비와는 달리 묘지 주변은 관리가 제대로 안 돼 무성하게 자라난 풀로 뒤덮여 있었다.
오른손에 큰 칼을 쥔 남성 조형물만 외롭게 서서 체코군단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듯 보였다.



이들이 어쩌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숨졌는지 궁금했던 기자가 묘지관리자에게 묘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묻자 "우리도 언제 해당 묘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모른다"는 답만 돌아왔다.
다만 기념비 주변에 적혀진 글귀를 통해 묘지가 1918년부터 1920년 사이 러시아 극동에서 전투를 벌이다 숨진 체코군단 소속 군인 163명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체코군단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부대다.
당시 체코는 슬로바키아와 함께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였다.
강제로 징집된 체코인들은 지배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위해 같은 슬라브계 민족인 러시아와 싸워야만 하는 기구한 운명에 놓여있었다.
전쟁 중 일부가 러시아에 투항하거나 귀순하는데 이 과정에서 체코군단이 탄생했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던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난 뒤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 정부가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조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막해진 체코군단은 시베리아를 경유해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유럽의 서부전선으로 이동했다.



공교롭게도 우리 독립군이 활동하던 연해주에 체코군단이 도착한 뒤 이들은 우리 독립군의 주요 무기 제공처가 된다.
이런 내용은 수원대 박환 교수가 지난 5월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만주 지역 독립군의 무기에 대해 다룬 '독립군과 무기'라는 책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박 교수는 다양한 통로를 활용한 독립군의 무기 구매 방식을 다루면서 체코군단과 독립군의 인연을 소개했다.
박 교수는 저서에서 특히 청산리 전투의 주인공인 이범석 대장의 무기 구매 회고 장면을 담았다.
이범석 대장은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서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 제국 식민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렸고 우리에 대해 연민을 표시했다"고 밝혔다.



체코군단의 무기 판매 행위가 군단의 공식적인 승인 하에서가 아닌 소수 군단병의 일탈적인 행위로 이뤄졌다는 등의 비판적인 학계의 해석도 존재하지만, 체코군단이 무기를 실질적으로 독립군에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발행된 체코 신문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는 체코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 중일 때 일어난 한국의 3·1운동을 여러 차례 보도하며 식민지배의 설움을 겪어야만 했던 조선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렸다.
체코군단은 1차 대전이 끝나고 1920년 2월 볼셰비키 정부와 정전협약을 체결,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다시 본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vodcast@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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