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비은행 금융기관 대출 검토"…증권사 등에 대출 시사(종합2보)
"회사채 시장 등 신용경색 가능성 배제 못해…비상상황 대비 안전장치 마련"
(서울=연합뉴스) 이지헌 기자 =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2일 금융 상황이 악화할 경우에는 회사채 시장 안정을 위해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해 대출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회사채 시장 불안이 심화할 경우 증권사 등 비은행 금융기관을 상대로 직접 대출을 해 신용경색을 막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이 총재는 이날 오후 간부회의를 소집해 회사채 및 기업어음(CP) 시장 등 금융시장 상황을 점검한 뒤 이처럼 말했다.
이 총재는 "1일 채권시장안정펀드가 가동되고 2일 한은의 전액공급방식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통한 유동성 공급이 시작됐다"며 "회사채 만기도래 규모 등을 고려할 때 당분간 시장의 자체 수요와 채안펀드 매입 등으로 (회사채가) 차환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판단했다.
이어 "그러나 앞으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전 세계적 전개와 국제 금융시장의 상황 변화에 따라 회사채 시장 등 국내 금융시장에서 신용경색이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한은으로선 비상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해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한은은 기본적으로는 은행 또는 공개시장운영을 통해 시장안정을 지원하지만, 상황이 악화될 경우에는 회사채 시장 안정을 위해 한국은행법 제80조에 의거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해 대출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다만 법에서 정한 한국은행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거나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성 지원은 안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은법 제80조는 금융기관의 신용공여가 크게 위축되는 등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자금 조달에 중대한 애로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경우 한은이 금융통화위원회 의결로 금융기관이 아닌 금융업 등 영리기업에 여신을 제공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한은이 은행 외에 한은법 제80조를 적용해 대출한 사례는 외환위기 시절 종합금융사 업무정지 및 콜시장 경색에 따른 유동성 지원을 위해 한국증권금융(2조원)과 신용관리기금(1조원)에 총 3조원을 대출한 게 유일하다.
특정 기업 지원을 위해 이 조항을 적용한 사례는 없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금융위기 당시 베어스턴스, AIG 등 금융기관에 긴급여신을 제공한 적이 있지만, 대형 금융회사들에 대한 규제와 감독을 강화한 2010년 도드-프랭크법 제정 후에는 특정 금융기관에 대한 여신이 제한됐다.
비은행 금융기관을 상대로 한 한은 대출이 시행될 경우 앞서 시행한 무제한 유동성 공급 대책을 보완해 증권사 등의 자금난을 덜어주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가 시장 일각에서 나온다.
금융사들이 담보로 맡길 만한 우량 증권을 이미 다른 용도의 담보로 많이 소진한 상태여서 한은의 무제한 RP 매입 방침에도 추가로 돈을 빌릴 여력이 없다는 관측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다만, 한은은 구체적인 대출 조건이나 시행 시기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한은 관계자는 "향후 시장 상황을 봐가며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총재가 이날 '검토' 언급을 공개적으로 내놓은 것은 회사채 및 CP 시장 불안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상황에서 한은의 역할 강화를 주문하는 시장 안팎의 요구에 반응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선제적인 행보에 나서는 미 연준과 비교해 한은이 지나치게 신중함을 고집하면서 자칫 실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일각에서 나온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도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유동성 지원과 관련해 "아직 한은의 문제의식이 안일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이례적으로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한은은 회사채나 CP를 직접 매입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 "정부 보증 없이는 한은법상 매입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pa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