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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전염병 사태 터졌는데 총 사재기하는 미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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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시선] 전염병 사태 터졌는데 총 사재기하는 미국인들
'코로나19가 총기 산업계에 혜택' 보도도…한국인에겐 낯선 풍경
총기 구매자 "화장지 놓고 싸우는 사람들, 식량 떨어지면 뭐할까"


(샌프란시스코=연합뉴스) 정성호 특파원 = 미국에서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본격적으로 확산하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생필품을 확보하려는 사재기 열풍이 불고 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식량과 물, 약품, 손 소독제, 마스크, 휴지 등을 잔뜩 챙겨두려는 사람들이 앞다퉈 상점 매대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사재기 대상이 된 품목 중에는 한국인으로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물건이 있다.
바로 총이다.
캘리포니아와 오클라호마 등지의 총포상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는 사진은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세계적인 전염병 사태가 터졌는데 총을 사러 달려간다는 것은 한국인의 사고 구조에서는 논리적 접점을 찾기 힘든 일이다.
CNN은 19일(현지시간) "올해는 코로나19가 총기 산업계에 예기치 못한 혜택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CNN에 따르면 탄약 판매사이트 애모닷컴(ammo.com)은 최근 3주간 사상 유례 없는 총알 판매 증가를 기록했다.
이 사이트는 2월 23일∼3월 15일 방문자가 그 직전 3주와 견줘 77% 늘고 그 결과 판매 건수가 222% 늘었다고 밝혔다.
매출은 무려 309%나 증가했다.
가장 인기 있는 총기는 상점마다, 주마다 다르다.
뉴저지주 우드브리지의 총포상 '불즈아이 택티컬 서플라이'의 직원은 반자동 돌격소총인 'AR-15'의 수요가 높다고 말했고, 총기를 드러내놓고 휴대할 수 있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는 중저가의 권총인 '토러스 PT111'가 품절됐다.
권총을 소유하려면 면허가 필요한 뉴욕주에서는 면허가 없어도 되는 산탄총이 가장 인기 높은 품목이다.
뉴욕시 북쪽의 마운트버넌에서 총포상을 운영하는 마이클 팀린은 "산탄총은 쓰기 쉬운 총기 중 하나"라며 "누군가 당신을 해치려 할 때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수수께끼 같은 코로나19와 총 사이의 연결고리는 총 구매자들의 구매 동기에서 찾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주 컬버의 한 총포상 앞에 줄 서서 기다리던 한 의사는 로스앤젤레스(LA)타임스에 처음으로 총을 사러 왔다며 "내게는 집과 가족이 있다. 사태가 악화하면 그들은 보호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포는 정부 기능이 마비되리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요컨대 '코로나19 사태→정부 마비→물자·식량 부족→약탈 시작'이라는 시나리오가 총기 사재기의 배경인 셈이다.
물론 정부 마비 사태까지 가지 않더라도 물자와 식량 부족 사태는 닥칠 수 있고 이를 가진 남의 집을 털려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
모든 주민에게 외출하지 말라는 '자택 대피' 명령이 내려진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는 이 명령이 시행된 이튿날 샘 리카도 시장이 "총포점은 필수적인 상점이 아니다"라며 총포점들에 문을 닫도록 했다.
병원이나 식료품점, 주유소 등은 필수적인 업태로 보고 영업을 허용했지만 총포상에도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자 내린 조치다.
그러자 탄약을 사려던 페인트 업자 조슈아 울프는 지역일간 머큐리뉴스에 "우리 스스로를 무장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라며 반발했다.
울프는 "사람들이 화장실 휴지를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걸 봤다. 그들이 자포자기의 상황이 됐을 때 무엇을 할지 걱정된다. 사람들이 상점을 약탈하기 시작하고 그들이 식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약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집을 찾아올 것이다"라며 "나는 준비돼 있고 싶다"고 말했다.
이런 우려는 한인 교민들 사이에서도 비슷하다.
LA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교민은 "코로나19 사태가 몇 달 간 지속해 생계가 막막해지는 사람들이 많아질까 봐 걱정된다"며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사회 전체가 불안해지면서 (1992년의) LA 폭동과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까 봐 그게 가장 두렵다"고 호소했다.
총포상 '불즈아이 택티컬 서플라이'의 판매원은 익명을 요구하며 "만약 식량·연료 같은 물자가 제한되고 사람들이 약탈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 고립될 수 있다는 공포감이 있다"고 말했다.
총기 산업계 애널리스트 롭 사우스위크는 "9·11테러, 1987년의 주식시장 붕괴 같은 불확실성의 시기가 오면 총기류 판매는 올라간다"고 말했다.
이런 미국인들의 태도는 "나와 내 가족은 국가나 정부가 아닌 내 스스로 지킨다"는 자경주의의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이는 또 미국 수정헌법 제2조에 국민의 무장할 권리를 집어넣은 건국이념에 이미 반영된 정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내 주변의 이웃이 언제든 내 재산과 생명을 노리는 약탈자로 돌변할 수 있다는 마음속 깊은 곳의 불신과 의심의 표징이기도 하다.
모든 미국인이 총기 사재기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문화적 맥락이 다른 사회에서 살아가는 미국인들을 한국의 관점에서 재단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다만 코로나19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사태 속에서 다른 국가와 달리 총기 사재기 바람이 부는 미국 사회의 일면은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와 함께 내 이웃이 내 집을 털러 들이닥칠 수 있다는 공포에도 맞서야 하는 미국인들의 황량한 내면을 비추는 듯해 씁쓸하다.
sisyphe@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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