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티 "부의 초집중 막으려면 개인 재산 축적 제한해야"
'자본과 이데올로기' 영문판 출간 앞두고 런던정경대서 강연
부유세율 최고 90%·주식 의결권 10% 제한 등 급진적 아이디어 제안
(런던=연합뉴스) 김수진 기자 = "만약 당신이 아시아에 있고, 물려줄 사유 재산이 많으면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이나 대만, 일본이 아닌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에 가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좋습니다. 중국은 상속세가 0%니까요."
'21세기 자본'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지난 6일(현지시간) 신작 '자본과 이데올로기'(Capital And Ideology) 영문판 출간을 기념해 모교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열린 대중 강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의 말에 행사장을 가득 메운 400여명의 청중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적절히 유머를 섞는 그의 솜씨에 강연 분위기는 내내 훈훈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주장만큼은 무겁고 담대했다.
그는 "기후 위기, 금융 위기, 사회 위기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현재 작동 중인 경제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며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국수주의자(nationalist)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쉬운 설명을 내놓지만 결국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고 지적했다.
피케티는 '모두에게 부를 대물림'(inheritance for all)하는 방향으로 시스템이 나아가야 한다며, 조세 정책을 주요 해법 중 하나로 제시했다.
그는 "소득세, 재산세 등 세제를 통해 개인의 재산축적을 합리적인 선에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이 '나쁜 사례'로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우리는 그동안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최상위 계층에 부가 급격히 집중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면서,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러시아가 단기간에 사유화를 겪으면서 이른바 올리가르히(oligarchy)로 불리는 소수의 신흥재벌만이 큰 혜택을 봤다고 지적했다.
개혁 개방 이후 중국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졌다고 설명했다.
한 때 '만인의 평등'을 주장했던 이들 국가에서 상속세와 같은 공정한 조세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것이 피케티의 진단이다.
반면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감소했던 시기에 이같은 변화를 주도했던 국가들을 살펴보면 조세 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
피케티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국가가 세금을 올렸다"면서 "특히 미국은 대공황 이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최상위 소득세율을 아주 아주 높게(very very high) 책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1930~1980년대 미국 평균 최고 소득세율이 80%가 넘었는데, 이 시기 미국 경제의 성장률과 생산성 역시 매우 높았다"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결코 높은 세율이 미국의 자본주의를 망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피케티는 "물론 단순히 세금 때문에 성장률이 올라갔다는 것이 아니라 재정이 견고해지면서 공공부문과 인프라, 교육에 대한 투자가 늘었고 결국 이 모든 것이 경제적 번영을 가져오는 데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피케티는 "합리적인 선에서 사유재산을 가져야 하지만 재산이 과도하게 집중돼서는 안된다"면서 "부의 초집중(hyper-concentration)을 막기 위해서는 여러 광범위한 그룹의 폭넓은 경제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신간에서 최대 90%의 부유세 및 상속세율을 통해 부를 거둬들인 뒤, 25세 청년에게 12만 유로(약 1억6천만원)의 재정적 지원을 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를 통해 청년층이 개인적이고 전문가적인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그는 '교육의 공정성'(educational justice), '재산 소유자와 노동자의 권리의 균형' 등을 강조했다.
주주가 얼마나 많은 주식을 보유했는지와 관계없이 의결권을 10%로 제한하고, 이사회 절반을 노동자로 채워야 한다는 것이 피케티의 생각이다.
아울러 "명백한 사회적·재정적 공정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재화나 서비스, 자본의 자유로운 교환도 조건에 따라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공통의 규제나 과세가 없는 상황에서 글로벌 자본의 자유로운 순환이 진짜 문제라며 이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부유세와 주식 의결권 제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 제한 등 자신의 주장이 실현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일부에서 비판하는 것과 같이 "전혀 급진적인 아이디어는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규제 완화를 옹호하기 전까지 이같은 정책이 광범위한 컨센서스를 이루던 때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피케티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내다봤다.
불평등이 결정론적인 게 아니라는 그는 "정치 결집(political mobilization)에 의해서도 변화할 수 있다. 과거에도 그런 사례가 많이 있었다"면서 "경제적으로 비교적 평등했던 시기가 미래에도 다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디만 미래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참여 사회주의'(participatory socialism) 혹은 '21세기 사회 민주주의'(social democracy for 21st century)가 필요하며, 이른 시일 내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주석을 제외하고 1천페이지가 넘는 그의 신작은 역사 속 다양한 정치 체제와 그 안에서 나타난 평등과 불평등의 역사적 사례로 채워져 있다.
책은 과거 노예제와 식민주의부터 인도의 카스트 제도, 현재의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불평등 체제'에 관한 연구 내용을 담았다.
현재 세대의 국수주의 포퓰리스트의 부상, 노동자 계층 유권자들과 괴리된 서구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도 들어가 있다.
앞서 2013년 출간한 '21세기 자본'은 1980년대 이후 글로벌 경제에서 커지는 불평등에 대한 지적을 통해 경제학 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베스트 셀러가 됐다.
90여분 동안 '불평등'이라는 불편한 역사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으면서도 미래를 희망적으로 바라본 그는 끝까지 유머도 놓치지 않았다.
"이 책은 잘 읽히지만 매우 긴 책입니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청중 웃음) 그래도 저는 전작보다 이 책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한 권만 읽어야 한다면 이걸 읽으세요"
gogog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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