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을 다시 화로에"…이탈리아서 또 반유대주의 전단 발견
연정 구성 민주당 지역당사 게시판에 나붙어…지역사회 경악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20세기 초 '파시즘'의 악몽을 경험한 이탈리아에서 반유대주의 정서가 여과 없이 표출된 사건이 최근 잇따라 발생해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을 자행한 독일 나치 문양과 유대인 혐오 낙서가 발견된 데 이어 이번에는 홀로코스트를 옹호하는 듯한 전단이 버젓이 나붙어 현지 사회를 경악케 했다.
29일(현지시간) 일간 라 레푸블리카 등에 따르면 이 전단은 27∼28일 밤사이 이탈리아 연립정부 한 축인 중도좌파 정당 민주당의 비첸차 지역당사 게시판에서 발견됐다.
전단에는 '1월 27일 기념일, 화로를 다시 열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흑인, 공산주의자는 무료입장'이라고 쓰여있고 나치 문양과 비슷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글자 형태도 나치가 애용한 고딕체다.
1월 27일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서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기념일이다. 올해는 그 75주년으로 국제적으로 대대적인 유대인 희생자 추모 행사가 진행됐다.
화로가 강제수용소 내 화장장을 의미한다는 점에 비춰보면 유대인 희생자 추모 분위기를 비꼬면서 홀로코스트를 노골적으로 옹호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전단에 언급된 유대인, 집시, 동성애자 등은 모두 2차 대전 당시 열등 종족으로 분류돼 나치에 의해 집단 학살된 사람들이다.
민주당은 이 일을 심각한 범죄로 규정하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주변 CCTV 등을 확인하며 전단을 붙인 용의자를 추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탈리아에선 근래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반유대주의 정서가 빠르게 번지면서 관련 사건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최근 북부 토리노 인근 몬도비 지역의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옥에 독일어로 '여기 유대인이 있다'(Juden hier)라는 내용의 낙서가 발견되는가 하면 유대인이 사는 토리노 시내 한 아파트에도 '더러운 유대인은 죽어라'라는 내용의 글이 스프레이로 휘갈겨졌다.
아프리카 모로코 출신이 운영하는 북부 브레시아의 한 주점과 로마 고등학교에선 스프레이로 그려진 나치 문양이 잇따라 발견되기도 했다.
이 사건들은 모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해방 기념일을 앞두고 발생했다는 특징이 있다.
작년 9월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종신 상원의원인 릴리아나 세그레가 극우주의자들에게 지속적인 살해 협박에 시달렸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세그레는 현재 경찰의 신변 보호까지 받고 있다.
이탈리아 의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반유대주의를 전담하는 산하 기구까지 신설했다.
한 민간단체 조사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작년 한 해 발생한 반유대주의 관련 사건은 251건으로 전년(181건) 대비 38.6% 증가했다.
반유대주의 확산에 현지 유대인 사회의 우려도 크다.
로마 유대인단체 부회장인 루벤 델라 로카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반유대주의는 한 사회의 문명 수준을 측정하는 온도계"라며 "이는 사회 전체를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와도 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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