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술꾼' 옐친 돌연사 염려…러 나토 가입 추진"…드러난 비화
英 외교문건 기밀해제…"대처 총리, 1986년 比 아키노 망명요청 수락"
(서울=연합뉴스) 하채림 기자 = 영국이 '술꾼'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의 돌연사 가능성을 걱정했고, 급변사태에 대비해 러시아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준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방안을 검토한 사실이 영국 정부 기밀문건을 통해 드러났다.
영국 국가기록원은 31일(런던 현지시간) 이러한 내용이 담긴 1995년 외교 전문 등 정부 문건의 기밀을 해제, 공개했다고 일간 가디언 등 영국 매체들이 보도했다.
1995년 10월 23일 옐친 러시아 대통령(1931∼1999)은 뉴욕에서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후 사흘만에 심장에 문제를 일으켜 모스크바의 병원에 입원했다.
모스크바 주재 영국대사 앤드루 우드는 영국 외무부 본부로 보낸 전문에서 옐친의 음주성향 등 그의 건강상태에 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우드 대사는 "그는 하이드파크(클린턴·옐친 정상회담이 열린 곳)에서 와인과 맥주를 들이부으면서 코냑이 없어서 아쉬워했다"며 "그가 너무 마셨다고 판단한 보좌관 하나가 샴페인 잔을 치울 정도였고, 그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취기로 신이 난 상태였다"고 전했다.
우드 대사는 이에 앞서 3개월 전에도 옐친이 심장 문제로 입원한 사실을 보고했다.
10월 27일자 전문에서 우드 대사는 "옐친이 갑작스럽게 사망한다면 우리는 유례없는 정치적 혼란 시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옐친의 돌연사 가능성을 진지하게 여긴 영국 정부는 조문단 구성과 애도 성명 등 대책의 개요를 짰을 뿐만 아니라 대담한 외교 구상까지 검토했다.
영국 외무부는 당시 러시아 남성의 기대수명 58세보다 여섯살이나 많은 옐친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봤다.
외무부는 옐친의 재입원 한달 후 총리실에 보낸 메모 형식 보고에서 "첫 심장마비 후에 음주량을 줄이려는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으며 이번에는 더 나으리라고 볼 만한 이유는 거의 없다"고 평가하면서, "옐친 대통령의 임기 중 사망할 가능성에 대비한 계획을 작성했다"고 설명했다.
옐친 대통령 재임 당시 러시아는 냉전 종식으로 영토가 축소되는 가운데 외교 관계 '새판 짜기'가 숨 가쁘게 진행되는 시기를 겪고 있었다.
공개된 문건에 따르면 영국이 보기에 옐친 대통령은 서방에 협조적이면서도 예측하기 어려운 지도자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옐친 대통령은 캐나다 핼리팩스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나토 확대를 러시아 선거 이후로 미루라고 촉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맬컴 리프킨드 당시 영국 국방장관은 러시아 정부의 불안을 진정시키는 방안으로 러시아를 나토의 준회원으로 가입시키는 구상을 제안했다.
리프킨드 장관의 구상은 영국 총리 별장에서 열린 내각 외교 세미나에서 논의됐다.
리프킨드 장관은 세미나에 앞서 존 메이저 당시 총리에게 자신의 구상을 미리 보고하면서 "나토에 준회원 자격을 새로 만드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지위를 만들면, 회원국에 대한 침략을 동맹 전체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하는 조항과 거부권 조항 등 나토의 핵심에는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도 러시아를 나토의 편으로 묶을 수 있다고 리프킨드 장관은 설명했다.
그러나 리프킨드 장관의 제안을 검토한 총리실 보고서는 나토의 의사 결정구조에 미칠 영향 등을 거론하며 부정적인 의견을 개진했으며, 켄 클라크 당시 재무장관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기록됐다.
자신의 제안 문건 공개와 관련한 가디언의 질문에 리프킨드 전 장관은 "당시는 푸틴(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이전 시기로,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매우 협조적이었다"고 답변했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문건 중에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필리핀 시민 혁명의 열기가 절정에 달한 1986년 2월 코라손 아키노 당시 야권 대선 후보의 망명을 승인했다는 기록도 포함됐다.
대처 총리의 외교 비서관 찰스 파월과 필리핀 주재 외교관이 주고받은 전문을 보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느낀 아키노는 2월 24일 영국대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긴급하게 타진했고, 대처 총리는 망명 요청을 수락했다.
영국 외교관은 전문에서 아키노 후보가 미국·일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영국 대사관행을 원한 것은 "영국이 우호적이고 믿을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대처 총리의 승인에도 아키노 후보의 영국대사관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튿날 밤 9시 마르코스 대통령이 집권 연장을 포기하고 퇴진하면서 아키노 후보는 망명자가 아닌 대통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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