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붕괴 30주년' 기념열기에 담긴 '차별·극우' 경계심
'서서갈등' 극복 통한 동서 교류·협력에서 시사점
메르켈, 동독 반체제 운동 치켜세워…옛 동독시민 자존심 찾아주기
옛동독지역서 이민자·난민 증가, 서독지역보다 적은데 반감은 높아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독일 통일의 문을 연 베를린 장벽의 붕괴 30주년 기념일인 9일을 앞두고 베를린에서는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번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은 5년 전 25주년과는 분위기가 다소 다르다.
5년 전에는 통일의 성과와 중동 등에서 위협받는 평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올해에는 옛 동독지역 시민에 대한 배려와 극우 부상에 대한 경계, 사회통합이 주요 메시지를 이루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지난 5일(현지시간) 주간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동독 체제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운 동독 시민들을 치켜세우면서 장벽 붕괴는 시민들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메르켈 총리는 옛 동독지역에서의 삶의 환경에 대한 불만이 혐오와 폭력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념하는 예술 행사 등도 화합의 이미지가 상당히 강조되고 있다.
2015년 이후 독일이 난민 100만 명 이상을 수용한 뒤 옛 동독지역을 중심으로 극우 성향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급부상하는 등 극우 세력의 확장 문제가 발등의 불로 떨어진 것과 연관돼 있다.
그동안 누차 지적돼 온 동서 지역 간의 경제적 격차 문제뿐만 아니라, 옛 동독지역 시민들의 '2등 시민'이라는 자조 섞인 심리적 박탈감도 극복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세계사적으로 냉전체제의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당시 동서독과 현재 남북한 간의 배경과 조건이 상당한 차이가 있어 직접적인 비교가 힘든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분단상황에 대한 주요 참고사례인 독일은 현재 두 가지 의미에서 상당히 시사점을 주고 있다.
당시 서독은 동서독 교류·협력을 위한 신동방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보수와 진보 진영 간, 또 같은 진영 간에 첨예한 갈등을 겪었다.
이를 극복하면서 '작은 발걸음'으로 평화·공존을 이룬 과정은 대북정책을 놓고 극심한 '남남갈등'을 겪는 우리로서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독일에서 통일 후유증과 연관돼 부각되는 이민자·타자 혐오와 극우 부상 문제 등 민주주의가 도전받는 모습은 우리 사회와도 무관치 않다.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이해 독일 사회가 과거를 기념하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을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이유인 셈이다.
연합뉴스는 올해 1월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 기념으로 기획한 '서독의 기억' 시리즈를 통해 총 8개 시리즈, 24개의 기사로도 '서서갈등'과 '2등 시민', '극우 부상' 등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짚어나가고 있고,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일을 앞두고 지난 5일부터는 8번째 마지막 시리즈를 통해 이런 문제를 포함해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의미와 과제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 이번주 베를린에서 200개 기념행사…"자유도시 위해 차별에 맞서야"
이번 베를린 장벽 30주년 기념행사의 초점이 혐오 배제와 화합, 자유의 가치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베를린 미카엘 뮐러 시장의 발언으로도 알 수 있다.
뮐러 시장은 최근 장벽 붕괴 이벤트와 관련해 "우리는 모든 형태의 차별로부터 맞서 자유의 도시를 위해 싸운다는 신호를 보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주에 베를린에서만 열리는 장벽 붕괴 관련 행사는 200여 개에 달한다.
지하철 U5 노선을 따라 '다음 정거장은 자유?'라는 전시가 지난 4일부터 열리고 있다.
역내에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독일의 역사가 사진 등으로 펼쳐져 있다.
4일에는 베를린 시의회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를 이끈 평화혁명에 대한 현재의 의미를 되짚어보며 현재 남은 과제를 진단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분단기 동서베를린의 통행 검문소 역할을 한 브란덴부르크 앞에는 150m 길이의 리본 전시 작품이 설치됐다.
미국인 작가 패트릭 션의 설치 작품으로 '미완의 통일'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시민 3만 명의 소원이 담겨 있다.
30년 전 동독 당국의 여행 자유화 조치 발표 직후 동서베를린의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에 몰려 서로 끌어올려 주며 기뻐하는 모습을 기념하기 위한 참여형 전시도 열리는 중이다.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입맞춤을 그린 벽화인 '형제의 키스'가 유명한 이스트사이드 갤러리의 벽화들은 환한 조명을 받고 있다.
장벽이 설치됐던 장소에서 스마트폰 카메라를 통해 30년 전 장벽을 증강현실(VR)로 느낄 수 있는 행사도 열리고 있다.
현재 해체된 베를린 장벽의 잔해는 세계 각지로 흩어져 한국을 포함해 40여개국 237개 장소에서 보관 중이다.
동베를린 지역의 대표적인 광장인 알렉산더플라츠의 주변 건물과 박물관 등에는 동독의 민주화 시위 등 베를린의 질곡의 역사를 담은 영상 및 이미지들이 투영되고 있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한반도의 현실을 엮는 전시도 이뤄지고 있다.
베를린 장벽과 한반도 비무장지대(DMZ)를 주제로 한 '언월'(Unwall)이라는 그룹전이 베를린 쿤스트크바티어 베타니엔의 전시장 프로젝트라움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에는 닉 노박, 베트람 코버, 프레데릭 프라우케, 귄터 샤퍼(이상 독일), 조영주, 김혜영, 권은비(이상 한국), 헨릭 플라흐트(노르웨이) 등 8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사찰 음식으로 유명한 정관 스님도 베를린을 찾아 8일 '화합의 만찬' 행사를 연다.
베를린 장벽이 지나던 인근의 성 마테우스 교회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에서 정관 스님은 남북의 자연을 한 그릇에서 음미할 수 있는 메뉴를 선보이고, 동독 시절 평화혁명을 지원했던 기독교 단체와 대담을 한다.
이와 함께 메르켈 총리는 오는 9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장벽 붕괴 기념 메인 행사에 참석해 연설한다.
동독 출신인 메르켈 총리가 장벽 붕괴일인 1989년 11월 9일 당시 사우나에 있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 4일 극우 테러 희생자를 위한 추모관을 찾아 신(新)나치 세력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베를린을 방문 중인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7일 베를린에 남아있는 장벽에 들렀다.
폼페이오 장관은 분단 시절 베를린을 방문했던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다. 미국 측은 동상을 애초 베를린 시내에 세우려 했으나, 베를린 시 당국이 협조를 하지 않아 미 대사관 경내에 세웠다.
◇ 경제적 장벽은 낮아지나 심리적 장벽은 높아져
독일 경제 연구소(DIW)가 지난 6일 발표한 '베를린 장벽 붕괴 30년 : 동서독 생활조건 균등화의 발전과 결여' 보고서에 따르면, 옛 동독지역의 2005년 실업률이 서독지역의 2배인 20.6%에 달했으나 지난해 7∼8%(옛 서독지역 5%)로 줄었다.
옛 동독지역의 생산성도 통일 직후 2배 차이에서 현재 서독의 83%로 올라갔다.
생활 만족도를 10점 만점으로 볼 때 옛 동독지역 시민들은 7.2, 서독지역 시민들은 7.4였다.
경제력 격차는 줄어들고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옛 동독지역 시민들의 불만은 커지고 있다.
특히 난민 대량 유입 이후 옛 동독지역 시민들의 불안감이 커지면서 기성정당에 등을 들리고 극우 성향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난민과 이민자에 대한 불안감은 과거 통일 당시 급격한 변화 속에서 옛 동독시민들이 대량 실업사태 등을 겪은 데 대한 트라우마 등이 작용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민자 등을 겪어보지 못한 데 따른 불안감이 조성됐다는 분석도 있다.
옛 동독지역 내에서 2017년 이민자 출신 주민의 비율이 7%이나, 옛 서독지역은 27%에 달한다.
이 가운데 난민 비율은 옛 서독지역이 1.8%이나 옛 동독지역은 0.4%에 불과하다.
◇ 우연이자 필연인 베를린 장벽 붕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것은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 앞에서의 시위를 필두로 확산한 민주화 운동에 에곤 크렌츠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은 서독으로의 여행 완화 정책을 내걸어 여론을 달래려 했다.
크렌츠로부터 개정 여행법 내용을 넘겨받은 공보담당 정치국원인 귄터 샤보브스키는 내용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법의 발효 시기에 대한 질문에 "즉시"라고 실언을 했다.
서독 공영방송 ARD의 저녁 8시 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들은 동독 시민들은 베를린 장벽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당국으로부터 지침을 받지 못한 국경수비대원들은 당황한 채 시민들에게 바리케이드를 열었다.
직후 베를린 장벽은 동서독 시민들이 한데 어울리는 축제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베를린뿐만 아니라 동서독 국경의 검문소에는 서독으로 여행을 가려는 동독의 자동차가 줄을 섰다.
당시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 중이던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급히 서베를린으로 향했다.
그는 수 만명의 동서베를린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통해 "동독 시민들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지지한다"고 말한 뒤 곧바로 2차 대전 승전국들을 상대로 피 말리는 통일외교를 시작했다.
이후 통일이 이뤄지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기까지 과정은 길고 길었다. 동독의 경제난과 동유럽 민주화 바람 등의 국제정세가 복잡하게 작용하면서 무너지게 됐다.
무엇보다 상당히 진행된 동서독 교류·협력이 바탕에 깔려있었다.
lkbin@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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