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즉위 의식 전례 답습…끊이지 않는 위헌 논란
'천황 주권국가' 시절 만든 규정 준용한 게 '불씨'
"국회 논의 통해 헌법에 어울리는 규정 마련해야"
(도쿄=연합뉴스) 박세진 특파원 = 나루히토(德仁·59) 일왕의 즉위를 대내외에 알리는 의식인 '소쿠이레이 세이덴 노 기'(卽位禮正殿の儀)를 계기로 정교분리 위반 문제 등 해묵은 논란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총리 등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인사 1천600여명과 세계 170여개국의 축하 사절 400여명을 앞에 두고 22일 오후 1시부터 약 30분간 일왕이 거처하는 고쿄(皇居) 내 영빈관인 '마쓰노마'(松の間)에서 열리는 이번 즉위례는 나루히토 일왕이 자신의 즉위를 선언하고 축하 인사를 받는 자리다.
지난 5월 1일 즉위하면서 치른 첫 의식인 '겐지토 쇼케이 노 기'(劍璽等承繼の儀)와 함께 즉위식을 구성하는 양대 축에 해당한다.
일본 정부는 나루히토 새 일왕의 즉위와 관련해 진행하는 여러 의식을 큰 골격에선 전후(戰後) 첫 사례인 직전 아키히토(明仁) 일왕 당시의 것을 답습하는 형태로 진행하기로 했다.
일본에서 전전(戰前)과 전후를 나누는 기준은 일왕(덴노·天皇)이 신격(神格)을 갖춘 국가 최고의 실권자에서 인격(人格)을 갖춘 상징적 존재로 바뀐 시점이다.
정무에는 관여하지 않는 상징적 존재로서의 일왕 위상에 걸맞게 즉위 의식을 바꾸는 문제를 놓고는 아키히토 전 일왕 때도 논쟁이 벌어졌고, 그 과정을 거쳐 완성된 것이 이번에 답습하는 의식의 골격이다.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일본 왕실 문제를 다루는 현 '황실전범'에는 즉위와 관련한 절차로 '황위 계승이 있을 때 즉위의 예를 행한다'라고만 규정돼 있다.
의식의 구체적인 절차를 정해 놓은 옛 등극령(登極令)은 전후에 폐지됐고, 후속 규정은 마련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히로히토(裕仁)로 널리 알려진 쇼와(昭和·1926∼1989) 일왕(124대)이 죽고 그의 아들인 아키히토 일왕(125대)이 뒤를 잇는 의식은 결국 폐지된 옛 등극령을 준용해 모든 절차가 마련됐다.
그러나 폐지된 등극령은 '천황 주권국가'이던 메이지(明治) 말기에 만들어진 만큼 전후의 국민주권 국가 체제와 어울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 사례로 일왕이 즉위 의식 때 사용하는 '다카미쿠라'(高御座)와 이곳에 일왕의 권위를 뜻하는 상징물로 안치하는 청동검 등 이른바 '삼종신기'(三種の神器)는 일본 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에 등장하는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와 연결돼 있다.
천손강림은 일본 왕가가 신(神)의 후손이라는 의미로, 일왕을 신격을 갖춘 존재로 받들게 하는 이념의 토대가 됐다.
이런 배경에서 전전(戰前)의 구(舊) 전범에는 황위를 계승할 때 '신기(神器)를 승계한다'가 명기돼 있었지만, 종교색이 짙다는 이유로 전후 전범에서는 삭제됐다고 한다.
정교분리 원칙을 담은 전후 일본 헌법하에서 처음 치러진 1990년의 아키히토 일왕 즉위 때는 위헌 문제가 불거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보완적 장치들이 마련됐다.
우선 다카미쿠라에 삼종신기 외에 일왕이 공무 때 사용하는 도장인 옥새 등을 함께 놓도록 했다. 삼종신기가 단순히 전통을 상징한다는 점을 부각해 의식을 둘러싼 종교적 색채 논란을 불식하기 위해서다.
또 일왕 앞에서 만세삼창을 하는 총리가 자리하는 위치를 다카미쿠라와 마쓰노마의 사이로 정해 높이를 어느 정도 비슷하게 맞췄다.
전전(戰前)과는 다른 '국민주권 민주주의국가'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여전히 다카미쿠라의 단이 높기 때문에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총리가 만세를 외치는 문구로는 '덴노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 萬歲)에 '즉위를 축하하며'란 구절을 앞에 추가해 일왕에 대한 '만세'의 취지를 한정했다.
일제의 침략 전쟁 때 자살폭탄 공격 등에 나서면서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던 악몽을 고려한 것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도 이번 즉위 의식에서 이 구호를 그대로 외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궁전 중정(中庭)에 세우는 깃발에 새기던 신화 속의 까마귀인 '야타가라스'(八咫烏) 등 초대 덴노로 알려진 진무(神武) 신화에 근거해 행했던 것을 없앴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교분리와 국민주권 원칙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새 일왕 즉위와 관련한 약 30개의 의식 중 일왕을 신격체로 떠받드는 전통종교인 신도(神道) 냄새가 풍기는 행사가 20개를 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내달 14∼15일 일왕 거처 내에서 진행되는 '대상제'(大嘗祭·다이조사이)다.
새 일왕 즉위 뒤 처음으로 거행하는 추수 감사 의식인 신상제(新嘗祭)를 일컫는 '대상제'는 막대한 국가 예산이 들어가 끊임없는 위헌 논란의 대상이 됐다.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비밀 의식이 주축인 이 행사를 치르는 데 임시 신사(神社) 건립 비용 등으로 약 27억엔의 예산을 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상제는 비교적 조촐한 의식이었지만 일본의 근대화가 본격화한 메이지 일왕 때부터 대규모 행사로 커졌다.
그간 일본 왕실 행사 비용은 왕실 자체 예산으로 충당하는 것이 통상의 관례였는데, 아베 정부는 헌법에 왕위 세습제가 정해져 있는 만큼 계승 행사는 공적 성격이 강하다는 이유를 들어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무시하고 국비(궁정비)로 충당하기로 했다.
이 문제를 놓고는 왕세제인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 후미히토(文仁) 왕자가 작년 11월 기자회견에서 반대 취지의 의견을 밝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후미히토 왕세제는 당시 대상제에 대해 "종교행사와 헌법의 관계를 봐야 한다"면서 왕실 예산인 내정비(內廷費)로 쓰는 게 맞는다고 주장했다.
대상제에 대해선 국비 지출 금지를 청구하는 소송도 빈번히 제기됐다.
이 소송을 맡았던 오사카 고등법원은 1995년 3월 청구 자체를 기각했지만 삼종신기와 다카미쿠라가 의식에 동원되는 것에 대해선 "종교적인 요소를 불식하고 있지 않다"며 "헌법상의 정교분리 규정을 위반하는 것일 수 있다는 의심을 통틀어 부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왕이 주권 대표인 총리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것도 "현행 헌법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주문을 내놓은 바 있다.
이와 관련, 아사히신문은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정상이라면 전후에 조속히 국회에서 논의해 세칙을 만들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아베 정부는 2017년 6월 아키히토 전 일왕을 위한 퇴위특례법을 제정한 후에도 헌법에 부합하는 세칙 제정을 검토할 시간이 있었는데도 결국 전례를 답습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비판했다.
신토 학자로 일본 왕실 문제를 연구하는 다카모리 아키노리(高森明勅) 씨는 아사히 인터뷰에서 "등극령을 대체할 규정을 만들지 않은 것은 정치의 태만"이라며 "왕위 계승이나 퇴위에 수반하는 의식 절차를 국회가 논의해 헌법에 어울리는 규정을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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