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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 역사와 특징은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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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 역사와 특징은②
남계서원 등 경남·전북·전남·충남 대표하는 서원 4곳



◇ 함양 남계서원
경남 함양군 남강 동쪽에 있는 남계서원(濫溪書院)은 영주 소수서원보다 9년 늦은 1552년에 건립됐다.
흔히 조선 두 번째 서원이라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지 않다.
지형 조건을 활용해 제향, 강학, 교류와 유식 공간을 나눠 서원 건물 배치 전형을 제시했다. 1561년 사우와 강당인 명성당(明誠堂)을 준공했고, 3년 뒤에 기숙사인 양정재(養正齋)와 보인재(輔仁齋)를 지었다. 건축물 크기는 다소 작은 편으로, 기숙사인 재사(齋舍)가 온돌방 1칸과 누마루 1칸으로 구성됐다.
함양에서 출생한 문인 일두 정여창(1450∼1504)을 배향했다. 정여창은 도동서원에 모신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 문하에 있었고, 벼슬은 예문관 검열과 안음현감 등을 지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순수한 민간인 신분인 사림 30여 명이 참여해 서원을 만들었다.
1566년 '남계'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 활동을 주도한 공간이라는 이유로 왜군이 건물을 불태웠다. 하지만 사림들이 1603년 옮겨 지었고, 1612년 오늘날 위치에 재건했다. 문루인 풍영루(風詠樓)는 1841년에 세웠다.
창건 무렵부터 19세기까지 사림들이 기부한 내역을 적은 '부보록'이 남았고, 책판과 서적은 장판각(藏板閣)에 보관했다. 소장 자료는 함양박물관에 있다.



◇ 정읍 무성서원
세계유산이 된 다른 서원과 비교하면 정읍시 칠보면 무성서원(武城書院)은 마을에 있는 교육 공간인 흥학당이 서원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서원에 배향한 인물도 많다. 통일신라시대 학자인 최치원(857∼?)을 비롯해 신잠(1491∼1554)과 정극인(1401∼1481), 송세림(1479∼?) 신위를 모셨다. 최치원을 제외한 이들은 향촌 교육과 연계돼 성리학을 권장하고 보급했다.
1615년 건립했으며, '태산서원'이라고 하다가 숙종 22년(1696)에 사액된 이후 전북 지역 사림 활동 거점이 됐다.
무성서원에서는 지역 자치규약인 향약을 통해 주민을 결집했다. 이러한 전통을 기반으로 1906년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병오창의가 일어났다.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이 사건은 서원이 지닌 지역 대표성과 정신사적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제향 의례 전에 서원 입구에서 건물 마당을 거쳐 제향 공간까지 황토를 뿌리는 점이 인상적이다. 선현이 오는 신로를 만들고, 사사로운 기운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행동이다.
건물은 사우와 강당인 명륜당(明倫堂), 기숙사인 강수재(講修齋)가 있다. 기숙사가 강당 앞마당이 아니라 따로 배치된 점이 이채롭다.



◇ 장성 필암서원
전남 장성 출신 문인인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숭앙하려고 1590년에 지은 서원이다. 김인후는 1540년 문과에 합격했고, 이후 인종이 왕이 되기 전 세자 시절에 가르쳤다. 그러나 인종이 1545년 즉위 9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사화가 일어나자 낙향했다.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는 사액은 1659년에 받았다.
남계서원처럼 임진왜란 시기인 1597년 건물이 전소됐으나, 1624년 지역 사림이 재건했다. 1672년 지금 자리로 서원을 이건했다.
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이 산지에 조성한 서원이라면, 필암서원은 평지에 입지한다. 경사지에 서원을 세우면 공간별 위계가 시각적으로 두드러지지만, 평지에서는 이러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문루인 확연루(廓然樓)를 지나면 나오는 강당인 청절당(淸節堂)이 입구를 등진 채 사우를 바라보는 점이 건축적 특징이다.
17세기 초반부터 구한말까지 제작한 문서들이 '필암서원 문적 일괄'이라는 명칭으로 보물로 지정됐다. 서원이 소유한 전답 규모와 소출량, 노비 등에 관한 정보를 상세하게 기록한 문서도 있으며, 노비 명단과 계보도인 '노비보'가 현존한다.
서원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송시열, 윤봉구 등이 썼다. 전남 지역에서는 19세기까지 훼철되지 않은 유일한 서원이다.



◇ 논산 돈암서원
충남 논산시 연산면 돈암서원(遯巖書院)은 1634년 건립돼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중 조성 시기가 가장 늦다. 사계 김장생(1548∼1631)이 학문을 가르치던 양성당(養性堂)을 중심으로 서원을 만들었고, 사액은 현종 원년인 1660년에 받았다.
김장생이 주요 배향 인물인데, 그는 율곡 이이 학문을 이은 예학 대가였다. 예학은 전란으로 피폐해진 국가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연구된 학문이다. 김장생이 구축한 학문 세계는 아들 김집을 통해 조선후기 양대 거물인 송준길, 송시열에게 이어졌으며, 돈암서원을 중심으로 예학 토론이 이뤄지기도 했다. 건축물 현판, 소장 목판과 장서도 예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돈암서원은 1881년 홍수가 나면서 지금 위치에 재건됐다. 강당인 응도당(凝道堂)은 당시에 기술력이 부족해 옮기지 못했고, 90년이 흐른 1971년에야 이전했다. 1903년 세운 서원 이건비에는 "시냇물 흐름이 바뀌고 담장이 무너지는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다. 호계(虎溪)의 언덕에 터를 잡아 새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응도당은 현존하는 서원 강당 중에 가장 크다고 알려졌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이며, 공포(지붕 하중을 받치기 위해 만든 구조물)를 경쾌한 디자인으로 설계해 건물의 둔중한 느낌을 보완했다. 장판각에 있는 많은 자료가 응도당에서 작성됐다.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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